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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꿈새김판이 설치돼있다.
 2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어린이날 100주년 기념 꿈새김판이 설치돼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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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어린이 날은 어른으로부터 '아이들, 애, 애들, 계집애' 등으로 불리던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하면서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정한 날이라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가봉,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 카메룬, 차드 같은 나라들은 12월 25일이 어린이 날이라고 하니 아이들을 예수의 탄생과도 같은 귀중한 의미로 기념하는 것 아닐까요.

어린이 날에는 우리나라 부모들은 놀이 동산 같은 곳에서 함께 즐기거나, 어린이가 평소에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 등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어린이날 기념식을 정부가 나서서 치르면서, 어린이 대표가 '어린이 헌장'을 낭독하기도 했고, 선행을 한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체육대회, 웅변대회, 글짓기대회, 가장행렬, 묘기시범,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지요.
 
 어린이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아모러한 희망도 광명도 업는 것을 깨닫쟈.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에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원래 우리나라 고유한 말에는 늙은이·젊은이·높은이·착한이라는 낱말들이 있습니다. '이'라는 글자는 '높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분'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어학자 이희승이 엮은 <국어대사전>(1981)에서 "어린이란 어린아이를 높여서 부르는 말로서 나이가 어린 아이란 뜻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단지 나이만 어린 아이란 뜻입니다. 마음도 포부도 생각도 연대 정신도 어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1923년 잡지 <개벽>에 기고된 내용을 보면, 전통사회에 만연했던 윤리적 억압의 배제를 주장합니다. 나아가 어린이의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들면 "어린이는 풀로 비기면 싹이오, 나무로 비기면 손인 것을 알쟈. … 한(限)업는 극(極)업는 보다 이상(以上)의 명일(明日)의 광명을 향하야 줄다름치는 자임을 알쟈. … 그들(어린이)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아모러한 희망도 광명도 업는 것을 깨닫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개벽 23호, 1923).

어린이는 '내일의 광명을 향하야 줄다름치는 자'이며, '그들을 떠나서는 아무런 희망도 광명도 없는' 상태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암울함 속에서 그들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요.

1923년 'K-어린이 날' 만든 나라

1923년에는 천도교 소년회 주도로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 각 소년운동 단체들이 모인 조선소년운동협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공식 채택하였다고 합니다. 이날이 전국적인 규모의 행사가 개최되기 시작한 제1회 어린이날입니다.

세계적으로는 192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국제 어린이날(International Children's Day)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과 비교해보면 우리 나라가 세계의 흐름보다 앞서는 'K-어린이 날'을 만든 나라로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도 근대로 접어들면서 어린이관이 변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어린이를 소극적 존재가 아닌 성장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나아가 미래 역할의 담당자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우리 대한민국 어린이들은 지독한 반공주의, 국가주의, 산업화 제일주의에 치이고, 1990년대에서 지금까지는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의 압박에 시달립니다. 이 기간 사회는 아동·청소년을 독립된 의사결정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어른들이 말할 때 아이들이 무언가 이야기하면 "어디서 말대답이야?"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작가 아거는 <어린 시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아이들에게 '순종' 또는 '복종'을 원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어린아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마치 아이에게 생각과 인격이 없는 것처럼 아이를 소유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싹은 시들어 가고 아이는 무기력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들씌워진 학생이란 신분은 아이의 정체성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리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학생이란 틀로 가두는 이유는 그래야 부모가 편하고, 교사들에게도 이들이 관리하는 대상이어서 편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공부' 이외에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고, 성인이 될 때까지 허용되지 않는 셈이라고요.

그동안 우리들은 어린이를 성인들의 일방적인 양육과 훈육과 교화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조되는 피조물로 보고 우수한 학업 성적만을 요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능동적으로 기능하고 창조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자기 발전적 존재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들을 가정과 국가 장래의 흥망을 좌우할 동료 동반자 시민으로서 우대하면서 보호도 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최근 한국교원대학교 김혜진 교수는 <어린이 시민성의 의미와 사회과 교육적 함의>라는 논문에서 "어린이와 성인의 생물학적 차이를 유년기의 문화적 요소로부터 분리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들이 생물학적으로 덜 성장하였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부족하고 약한 집단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또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에 따라서 어린이는 달리 행동할 수 있다. 즉 어린이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어린이의 행위는 달라질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를 보호·양육·교화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성인들의 일방적인 관점이자 문화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유년기를 오직 학습을 하는 시기로 여기고 있어, 유년기의 어린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 또 하나의 문제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받고, 보호의 울타리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정신적·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보호와 자율적·독립적 삶의 탐색 간에 조절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김교수는 말합니다.

시민이자 시민이 되어가는 존재

어린이와 성인 모두 미성숙한 부분이 있으며 자신을 완성해 가는 존재 아닐까요? 따라서 어린이와 성인 모두 시민이자 시민이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를 시민으로 본다는 것은 어린이의 사회에 대한 기여와 통찰력을 적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이가 성인과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어린이를 가치 있는 공헌을 하는 사회적 존재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교육부도 1993년 <민주시민교육지도자료>에서 "학생들은 이미 현재 '민주 시민'으로서 어엿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민주 시민 자질은 결코 '현재' '여기서' 배워서 '미래에' '거기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후 적용을 위하여 비축되거나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민주주의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코 '유예'라든가 '보류'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라고 행정문서로 표현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고 참여하여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단 성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를 현재 시민으로 인식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삶의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며 지역 공동체를 활성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새로운 정부와 교육감들이 어린이날을 '어린 시민의 날'로 개정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 동반자인 시민으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특별한 날로 기념하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날 일상적으로 학교에서 시민성이 돋보이는 행동을 한 초중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민교육상을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 또는 학교장 이름으로 시상하면 좋겠습니다.

2022개정 교육 과정의 유초중등학교 교육 과정에 '시민교육' 과목을 개설하면 더욱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전 세계의 약 절반 정도의 국가들이 교육 과정에 시민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유치원까지 시민교육을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걱정하실 수도 있겠네요.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유아교육 시기에 시민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15개정 유치원 교육과정의 목적에서 "누리과정은 만 3~5세 유아의 심신의 건강과 조화로운 발달을 도와 민주시민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더 앞서서는 1993년 한국교육개발원이 <유치원용 민주시민교육 자료>와 이에 따른 교사용 지도서까지 발행했었습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유아들의 '민주시민의 기초 형성'을 게을리 했기에 오늘날 20~30대 남녀의 심각한 갈등 같은 상황을 낳았다고 봅니다.

아동·청소년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우리 사회 문제 해결에 초대한다면 성인들과 동료 동반자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 되면 우리나라의 지독한 권위적인 정치문화도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동·청소년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 긍지를 느끼는 시민으로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적으로 청소년 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줄어들고, 연대하는 마음의 증가로 사회적 자본 결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4차산업 혁명 시대에 시민들의 민주적 삶에 영향을 주는 일자리 불안정 심화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 아동·청소년들이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사회적 안전망과 관련된 사회적 가치에 대한 합의가 그들에게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가 그런 합의를 해서 좋은 사회를 물려줄 수 있을까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해서 표현해 봅니다. 우리가 그들을 시민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로 와서 늠름한 동료 동반자 시민이 되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교육부(1993). 민주시민교육지도자료, 18-21
김혜진(2020). 어린이 시민성의 의미와 사회과 교육적 함의. 사회과 교육. 59(3)호. 309-324
아거(2018). 어린 시민. 창비교육. 27-8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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