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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오솔길에서 만난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 할머니  아파트 오솔길에서 만난 할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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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마트에서 무얼 사셨는지
하얀 비닐 봉투 두 개를 손에 드신 할머니가
아파트 오솔길 의자에 짐을 먼저 내려놓고는
당신도 펄썩 몸을 부려놓으시며

땅에 다 대고 뭣 찍수?
햇살 찍고 있어요!

여기 햇살이 있잖아요
나무 그늘과 함께 예쁜 무늬를 만들고 있네요
저기도 햇살이 있지만
햇살 혼자서는 아무 무늬도 만들지 못하고요

할머니에게 햇살 사진을 보여드리자
저것도 이렇게 찍어 놓니까 이쁘네!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몇 걸음 뒤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할머니, 이 사진이 더 예쁜데요!
오솔길 의자에 앉아 있는  
당신의 뒷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시는 할머니   

이번에는 별 말씀이 없으시다가  
허공을 보며 수줍게 웃으신다 
- 졸시 '대화'


전날 아침 일이다. 서울 갈 일이 있어서 고속버스 표를 예매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오솔길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그러기 전, 나는 시금초라는 풀꽃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정식 이름은 괭이밥이다.

햇살이 좋은 봄날이면 도심의 골목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나는 어렵지 않게 찾아냈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오는 길에 오월의 온유한 햇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잎을 씹으면 신맛이 난다고 해서 시금초라고 한다.
▲ 괭이밥  잎을 씹으면 신맛이 난다고 해서 시금초라고 한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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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오월 아침 햇살 세례가 좋았던 것인데, 그러다가 그 햇살을 사진기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근데 햇살을 어떻게 찍지? 나는 바람을 그리고 싶은 화가처럼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무슨 계시처럼 오솔길 바닥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에 눈이 갔던 것!

아, 그늘이 있어서 예쁜 햇살 무늬도 생기는구나! 햇살 혼자서는 아무 무늬도 만들지 못하는구나! 우리의 삶도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이 함께 어우러져야 저런 아름다운 무늬가 생기겠구나!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땅바닥을 향해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고 있을 때 할머니의 음성이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

"땅에다 대고 뭘 찍수?"
"햇살 찍고 있어요!"

 
햇살 혼자서는 저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지 못한다.
▲ 햇살 무늬  햇살 혼자서는 저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지 못한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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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과 햇살이 함께 만든 예쁜 무늬를 할머니께 보여드렸다.
▲ 햇살 무늬  나무 그늘과 햇살이 함께 만든 예쁜 무늬를 할머니께 보여드렸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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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는 시금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할머니의 짐 보따리 하나를 챙겨들고 오솔길을 나란히 걸어가다가 골목길에서 찍은 시금초 사진을 보여드렸던 것인데, 할머니는 시금초를 알고 계셨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때도 시금초를 썼다고 하셨다.

그러자 나도 어릴 적에 엄마 따라 산에 나무 하러 갔다가 목이 마르면 신맛이 나는 시금초를 씹어 먹었던 기억을 되살려 말씀을 드렸다. 그것 말고도 시금초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할머니께 고할 것은 못되었다.
 
햇살 좋은 봄날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이지만 보면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런 풀꽃이다.
▲ 괭이밥  햇살 좋은 봄날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이지만 보면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런 풀꽃이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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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경비실에 세워진 싸리 빗자루다. 예쁜 꽃사진에만 눈이 팔려 한 번도 찍어주지 못했다. 찍어놓고 보니 참하고 예쁘다. 싸리 빗자루의 쓸모를 생각하면 백 번도 더 찍어주었어야 맞다. 내가 나쁘다.
▲ 싸리 빗자루  아파트 경비실에 세워진 싸리 빗자루다. 예쁜 꽃사진에만 눈이 팔려 한 번도 찍어주지 못했다. 찍어놓고 보니 참하고 예쁘다. 싸리 빗자루의 쓸모를 생각하면 백 번도 더 찍어주었어야 맞다. 내가 나쁘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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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꽃 이름에 관한 것이었고, 내가 30년 가까이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생명에 눈 뜨기 전,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한. 

들풀

들풀을 보면 생각난다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한 아이들

마음으로 읽고
눈빛으로 알고
따스히 흘러
빗장을 열게 하는 사랑
나눠준 적 없는 아이들

그런 사랑 받은 적 없어
더 가슴 태웠을 것을
더 다가오고 싶었을 것을

들풀을 보니 생각난다
화사하지 못하여
키에 가리워
먼발치로만 서성이던 아이들

한 번 더 다가섰으면
꽃이 되었을 우리 아이들.

 
할머니와 내가 앉아 있던 아파트 오솔길로 꼬마 아이가 아장 아장 걸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아가야!
▲ 꼬마 아이  할머니와 내가 앉아 있던 아파트 오솔길로 꼬마 아이가 아장 아장 걸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아가야!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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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괭이밥 시금초 , #햇살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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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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