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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30일 독일에서 한 인물이 수상직에 올랐다. 그 인물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점과 홀로코스트라는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그가 통치하던 나치 독일 시대를 이른바 '암흑의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히틀러가 씻을 수 없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서 비판해야 하지만, 적어도 1930년대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지지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이유를 찾기 위해 당시 나치시대에 진행됐던 복지정책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4월 20일은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집권과정
 
히틀러의 사진
▲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의 사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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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tvN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 나치 독일편에서는,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은 이유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초 인플레이션 현상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관점이다. 1920년대 초중반에 겪은 인플레이션 현상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상당 부분 회복했다.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세계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독일 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1920년에 창당된 나치당은 1923년 히틀러가 주도한 쿠테타 이후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졌다가, 1929년 경제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나치당은 1930년 들어 대략 2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해 9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 18.3%의 득표율을 얻으며 제2의 당으로 부상했다. 1931년 11월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 37.1%의 득표율을 얻은 나치당은 당시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친 것 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고, 1932년엔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직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할 당시 나치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율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략 절반 이하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4년 8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이후 총통이 된 히틀러와 나치당의 지지율은 90%까지 상승했다. 그 이후부터 독일 내의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독일인들의 지지는 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치시대의 복지정책

그 이유 중 하나는 히틀러 시대의 복지 정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민족 공동체'를 중시하고 있었다. 즉, '민족 공동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시킨 것이며, 이에 따라 "우수한 독일 민족에게는 훌륭한 복지 정책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들 논리였다.

나치의 정책은 소위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비록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사유재산을 국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지만, 자본가의 지나친 이윤추구는 민족 공동체를 해친다고 보았다. 따라서 나치는 초기부터 금융업 폐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 모든 불로소득 금지 및 노동자 복지 정책을 정책으로 내세웠었다.

정권을 잡은 나치는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을 계획경제를 통해 해결했다. 당시 나치가 추진한 경제는 국가주도의 계획경제였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30% 이상이던 독일 내의 실업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1936년의 실질 국민 총생산은 나치 정권 이전의 최고였던 1928년을 15%나 상회했다. 현재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도 히틀러 시대에 진행됐다.

나치 독일은 노동자를 위한 정책으로 크루즈선을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 스키와 요트 등의 스포츠, 국내도보여행, 고전음악 관람과 연극관람, 미술전시와 공장축제 등의 여가 프로그램을 노동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선전효과가 매우 컸던 선상 크루즈 여행을 비롯한 전체 여행 참가자의 숫자는 1934년 230만 명, 1935년 630만 명, 1937년 950만 명, 1938년 1천 30만 명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여행제공을 위해 나치 독일은 KDF라는 국영 여행사를 만들어, 자국민에게 제공한 것이다. KDF는 저소득 노동자 가정들도 소정의 적립금만 내면 국가의 보조금을 더해 각종 공연 및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사업의 일환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외제차로 유명한 민족 자동차 폭스바겐(Volkswagen)도 나치시대 노동자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생산됐다고 알려져 있다. 최대 시속 100km 이상을 달리는 이 자동차를 제공하고자 했다. 물론 많이 제공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이러한 정책이 노동자들에게 값싼 자동차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증가된 주당 노동시간은 1939년 당시 주당 평균 48시간이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 국민들이 나치를 지지한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정책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단순히 히틀러 집권기를 광란의 시대로 보기에는 어느정도 무리가 있다.

복지정책과 이데올로기적 한계

나치 독일 시대의 복지는 선진적인 면들도 있었으나, 그 한계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 핵심은 바로 나치가 근본적으로 소유한, 편협한 인종 이데올로기다. 즉 이러한 선진적인 복지정책은 어디까지나 독일 민족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나치 독일이 광적으로 증오하던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즉 나치의 복지는, 자국민들의 지지를 결집해내기 위한, 그래서 자국 독일인만을 위한 '갈라치기 복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가 함께 있는데, 반자본주의 못지 않게 반공주의적 태도도 분명했다. 나치의 반공주의는 기본적으로 나치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한 반유대주의와 반공주의적 정서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인종 학살로 나타났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2700만 이상의 소련인이 죽었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나치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으로만 3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나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대다수도 소련 영토 내에 있던 유대인이었다.

나치의 편협한 인종 이데올로기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전쟁범죄를 불러일으켰고, 타민족을 차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치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집권 초기 행해졌던 선진적인 복지정책들도 바로 이러한 틀에서 제공된 것이고, 따라서 그 한계와 문제점도 명확한 것이다.

최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격렬해지면서, 다시금 나치에 대한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나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나서, 비판적 차원에서라도 나치라는 존재가 어떻게 독일에서 부상했는지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지난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 나치의 학살이 자행된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홀로코스트 등 2차대전 때 인류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를 한 장면이다. 동방정책의 주창자인 브란트는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일과 주변국 간 화해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지난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 나치의 학살이 자행된 유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홀로코스트 등 2차대전 때 인류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를 한 장면이다. 동방정책의 주창자인 브란트는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일과 주변국 간 화해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연합뉴스=D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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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틀러, #나치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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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전공자입니다. 사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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