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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들춰본 4월 일정표는 유독 노란 콩 머리들로 가득한 콩나물 시루같이 보였다.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처럼 무슨 할 일들을 이렇게 많이 써 놓았는지. 주 터전인 학원에서는 중고등 학생들의 중간고사를 앞두고 시험대비를 위한 수업 일정을 빼곡히 잡아놓았다. 힐링을 위한 장소로 책방을 열었지만 이 역시 사업장이라 수시로 내 몸이 필요하다 보니 어느 날은 일상이 뒤죽박죽되어 최근에는 주위의 걱정과 염려를 받기도 한다.

게다가 코로나시대의 마침을 알리듯이 지역의 봉사단체들은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비대면으로나마 꾸준히 청소년 활동을 지도해온 터라 올해도 우리 학생들 단체와 연합하는 활동이 기다렸다. 벌써 첫 행사로 동아리 학생가족과 장애인단체와의 음식나눔이 있었고, 무료급식센터로 나누는 필사시화엽서쓰기 활동도 있었다.

기독교의 부활절이 다가오면서 4월의 아픈 기억은 저절로 소환되었다. 군산의 모 시민단체에서 올린 4.16 세월호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고 책방에서 지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활동을 생각했다. 생각이 옳다 느껴지면 바로 행동하는 나의 실천력이 또 발동해서 책방지기들과 상의했다. 4.16에 우리도 작은 행사하나 해보면 어때요 라고.

매년 성당에서 받기만 했던 부활절 계란 위의 그림이 생각났다. 책방지기들은 한결같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잘한다. 말랭이 마을 입주 후 지난 3월을 보니 주말 관광객이 제법 있었기에 책방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세월호의 슬픔을 기억하고 부활절 계란그림 그리기를 제안했다. 안나 샘이 보내준 계란 그림 사진을 실어 책방 '봄날의 산책'에서 4.16세월호 추모에 참가할 수 있는 안내문을 SNS에 올렸다.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 장치들은 어느새 회색빛이 맴돌았다. 2014년 4월 16일 그날 아침에 나는 학부모를 대표하는 모 단체의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온 첫 소식은 단순한 해양사고처럼 들렸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배의 사고는 언제나 나를 경직으로 몰아넣는다. 평생 어부였던 아버지가 출항 후 귀환할 때까지 엄마의 걱정은 언제나 어린 우리형제들의 기도가 되었다. 물에 대한 무서움은 무의식적으로 반사하는 날카로운 감정의 칼처럼 느껴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슬픔으로 오랫동안 앓았다. 슬픔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결국 정권을 바꾸는 촛불혁명이 되었고 그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안은 세월호 가족들과 만났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세월호 가족들에게 쏟아지는 말들은 어느새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 정도면 됐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책방에서의 행사를 준비하면서 의식이나 있다는 지인한테서 또 같은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감정이 흔들렸다. 적어도 자식있는 우리들은 그렇게 얘기하면 안된다고, 우리만큼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그 정도면 됐지는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냐고. 지인은 바로 수긍하고 실언했다고, 답답해서 그냥 나온 말이라고 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있자니 금요일 책방지기 효영샘의 사진이 왔다. 준비해준 노란풍선을 불어서 책방 앞 정원의 난간에 붙인 사진이었다. 책방 대장인 내가 내일 행사를 위해 서너개만 불어서 달아보라고 했는데 세상에나. 풍선불기 기구도 없이 입으로 불어서 난간을 채운 사진이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니.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다. 포장만 요란 떤 나와 달리 효영샘은 저 노란풍선에 온전히 마음을 담았다.
 
책방지기 효영샘이 입으로 불어서 책방의 난간에 매달린 노랑풍선을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도 함께 세월호 유가족에게 위로를 보냈다.
▲ 책방 "봄날의산책"이 보내는 위로 책방지기 효영샘이 입으로 불어서 책방의 난간에 매달린 노랑풍선을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도 함께 세월호 유가족에게 위로를 보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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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다시 한번 지인들에게 오늘의 행사내용을 알렸다.
 
말랭이 책방 <봄날의 산책>과 함께하는 세월호 8주기 추모를 위한 작은 행사가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슬픔을 기억하는 저장소가 작아져요. 자녀분들과 함께 부활절 계란과 노랑풍선 위에 그림으로서 다시 한번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보내요.
 
준비한 하얀 계란을 정성스럽게 삶고, 그림을 그릴 각종 필기도구, 시민단체에서 나눠준 노란 리본 고리와 엽서 등을 챙겨서 책방 앞에 전시했다. 주말이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오늘이 4.16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날임을 알도록 리본과 스티커를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했다. 시간이 되는 사람은 계란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홍보했다. 행사 참가 후 기부금을 주신다면 유가족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휴가 온 군인 셋이 왔다. 나이를 물으니 내 아들과 같은 나이였다. 세월호 사건 때 중3이었다고 또렷히 기억한다고 했다. 뜻밖에 계란 그림을 그려도 되냐고 해서 참가비 3000원이 기부금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흔쾌히 허락을 받고 활동 중에 나눈 이런저런 사회 정치성 대화에 왠지 기분이 좋았다. 이런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나라라면 희망이 있겠구나!

행사 4시간 동안 초등자녀를 둔 학부모들, 중고등 청소년들을 포함하여 40여 명의 손님이 다녀갔다.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세월호의 기억을 전하는 학부모들의 자세는 정말 진지했고 아름다웠다. 봄날의 산책 마당에 내리쬐는 햇빛보다 더 찬란하고 따뜻했다. 교육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고 나라가 나라답게 된다는 말을 내가 먼저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부활절과 세월호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자 책방에 모인 초등생 가족들
 부활절과 세월호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자 책방에 모인 초등생 가족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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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4.16은 잊고 싶은 기억이길 원한다. 그러나 치유없이 매장되는 기억이 아니길 원한다. 책방의 계단 틈 사이로 올라온 작은 제비꽃들도 제 존재를 바로 봐 달라고 매 순간 손짓한다. 우연이라도 그 존재를 못 본 체 할 것이 두려워 내 맘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데 하물며 세월호의 기억을 어찌 모르는 체 하는가. 세월호의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전하며 오늘을 보낸다.

태그:#세월호,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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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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