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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 외면한 두김씨 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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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결과는 민주진영의 참담한 패배였다.

원인은 야권분열과 관권선거 그리고 언론의 편파보도와 용공음해가 판을 쳤다. 김영삼ㆍ김대중 두 김씨가 유효표의 55%를 얻고도 노태우가 얻은 36.6%에 눌려 정권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선거운동 과정은 물론 개표과정에서 많은 부정과 관권개입이 자행되었다. 특히 민정당이 의도적으로 조장한 지역감정의 격화와 금품살포, 흑색선전 등이 선거를 과열시키고 부정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13대 대통령선거의 가장 대표적인 부정은 '구로구청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투표함 반출사건이다. 무장경찰 6~8명이 지키고 있던 1톤 트럭에 투표함 1개, 부재자 투표 인명부 1박스, 인주ㆍ면장갑 등이 식빵ㆍ귤ㆍ과자의 박스 밑에 감춰져 있던 것을 시민의 제보로 평민당원들이 적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시민ㆍ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구로구청으로 몰려들었고, 구청3층 선관위 사무실에서 또 다시 투표함 1개, 붓 뚜껑 60개, 새 인주 70개, 백지투표용지 1,500매 등이 적발되었다. 붓 뚜껑에서 인주가 선명하게 묻어나 방금 사용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5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ㆍ학생ㆍ평민당원들의 항의농성이 계속되자 새벽 6시경 조종석 시경국장이 지휘하는 4천여 명의 무장 경찰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면서 진압작전을 개시하자 시위자들의 처절한 저항으로 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경찰은 총 1,034명을 대통령선거법위반, 집시법위반혐의 등으로 연행했다. 
 
중앙선관위가 보존 중인 1987년 대선 구로구을 우편 투표함
▲ 구로구을 우편투표함 중앙선관위가 보존 중인 1987년 대선 구로구을 우편 투표함
ⓒ 한국정치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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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통령선거는 민주시민과 학생들이 피로써 쟁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적전분열로 그 어부지리를 군사정권에 헌납한 꼴이 되어, 두 김씨와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은 내내 국민의 차가운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진정한 민주문민정부의 실현은 다시금 늦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사회고발과 현실비판에 앞장서왔던 정의구현사제단은 참담한 현실 앞에 암담함을 새겨야 했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천주교공동위원회는 12월 17일 성명서 〈모든 민주세력은 '선거무효 선언'을〉에서 "현재까지의 투ㆍ개표 과정을 모두 지켜본 결과 금번 선거는 국민의 한결같은 소망과는 달리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며, 이번 선거가 무효임을 선언했다. 

부정선거로 규정한 이유로 △ 경악! 부정투표함에 도적질 당한 민주ㆍ민권, 구로구청 1만여 시민 밤새워 투표함 사수 △ 릴레이 투표 적발한 감시단원에게 칼질! △ 전국에서 자행된 개표 부정행위 △ 개표 부정사례 △ 전라도 출신 주민만 투표권 말소 △ 때 아닌 정전 소동!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제시했다.

1987년 6월항쟁의 결실인 수평적 정권교체 즉 민간정부 수립을 이루지 못한 책임으로 두 김씨의 단일화 실패에 두는 분석이 많았다. 이와는 다른 견해도 없지 않았다. 

1987년에 군부독재정권을 완전히 케이오 시켜서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국가체제를 장악ㆍ유지할 수 있는 능력면에서 손상이 없었어요. 경찰도 민주화 쪽으로 항복해 들어오지 않았고, 군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내부 분열의 조짐이 아직 없었다는 거지요.  

아마 YS, DJ가 마음을 일치하여 단일후보를 냈다면, 그리고 그때 정권 차원에서 선거조작이나 여론조작을 했다면 진짜 독재세력을 제압할만한 대봉기 상황에 직면할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4.19 직후 이승만 세력이 총체적으로 몰락하듯이요. 그런데 정권이 조금 망설이며 전선을 후퇴시킨 거지요. 다만 양김 중 한 명이 집권했다고 하면, 군부는 두세 차례 쿠데타를 시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와 필리핀,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군부가 두어 차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점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주석 5)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974년 9월 24일 강원도 원주에서 '정의'의 기치를 들고 출범하여 유신체제와 5공 군부독재와 싸우는 동안 한국사회의 민주화세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 중심에 사제단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역할을 하였다.

깃발도 강령도 없는 성직자들의 느슨한 조직이지만 항상 생명력이 넘치고 열려 있었다. 안팎의 질시와 권력의 탄압이 심했으나 움츠리지 않았고 시류에 편승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억울한 일, 정의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과 늘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에 비해 학자들의 평가는 지극히 인색한 편이다. 

유신ㆍ5공시대에 정의구현사제단의 존재는 어둠속의 횃불이었다. 세상의 불의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고, 예언자적 발언으로 독재와 싸웠다. 그런가 하면 사제단의 존재로 하여 낡고 고루한 한국천주교(가톨릭)에 신생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교회의 쇄신에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그들은 명예도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정의와 진실을 찾는 구도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사제단을 모형으로 해서 설립된 실천불교승가회가 있고, 유사한 명칭의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었다. 정의실천법조회(정법회)가 1986년 5월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1989년 11월에 출범하였다. 

이외에도 민족문학작가회의(1974년), 민주화교수협의회(1987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1988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1989년) 등이 속속 출범하면서 정의구현사제단과 힘을 모아 민주화의 대열에 섰다.  


주석
5> 함세웅, <이 땅에 정의를>, 463~46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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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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