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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은 통신수단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16세기, 사대부들은 안부를 전하거나 서로의 소식을 어떤 방법으로 주고 받았을까?

일반적으로 이 시기 사람들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당시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어 서울과 지방의 연락 체계가 매우 느렸을 것 같지만 의외로 빠르고 다양하게 소식들이 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길에 부인 송덕봉에게 보낸편지다. 당시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알리는 일상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미암 박물관>
▲ 미암 유희춘 간찰 미암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던 길에 부인 송덕봉에게 보낸편지다. 당시 편지는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알리는 일상적인 통신수단이었다. <미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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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를 보면 유희춘은 거의 매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편지를 통해 수시로 당시 사림들과 교류하였으며, 집안의 대소사나 인척들과의 일들을 주고 받았다. 기대승과 이황이 편지를 통해 '사단칠정론' 사상논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편지는 일반적인 정보교환 수단이었다.

경방자 통해 지방 소식 전달받아

지금처럼 전화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유희춘은 서울에 있으면서도 편지를 통해 지방(해남)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해남은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중에 하나였지만 빈번하게 소식들이 오가고 있었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해남의 일가 친척들과 지속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해남에는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없었지만 과부가 되어 살고 있는 누님과 첩 남원방씨, 그리고 무엇보다 사위인 윤관중을 비롯 사돈 집안인 해남윤씨가 재지사족(조선시대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살고 있었다. 따라서 유희춘은 이들과 수시로 편지를 전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지금의 우체부처럼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없던 16세기 무렵은 어떻게 편지를 주고 받았을까? 일반적으로는 사대부 양반들은 대부분 집안 하인들이 편지 심부름을 담당하였다. 어느 정도 글귀를 알아먹고 똑똑한 하인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미암일기>를 보면 이 편지를 전달하는 이로 '경방자京房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방자는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문서를 전달하는 하인으로 소속 지방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경방자는 공적인 문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던 것 같다.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안된 1567년 10월 19일 해남의 경방자가 사돈관계인 해남윤씨 윤동래의 편지를 전달해 준다.
 
1567년 10월 19일
해남의 경방자가 윤동래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안동대도호부사 윤복과 해남누님과 첩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또 성주 김응인 앞으로 청어를 파는 배에다 작은 묘표석 세 개를 실어 순천의 영춘(유희춘의 사촌동생)에게 보내달라고 가지고 왔다.


 
경방자는 관의 공적인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처럼 관직에 있는 사대부들의 편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자신의 해배 소식을 관속官屬을 빌려 담양과 해남에 편지를 보내 알리게 한다.
 
1567년 10월 14일
해질 무렵에 이조의 하전이 12일의 전하의 교지를 가지고 왔는데 유희춘, 노수신, 김난상을 방면해 주고 직첩도 돌려줄 것이며 경연관으로 차출한다 하고 …, 관속을 빌려 좋은 소식을 담양과 남원에 알리고 또 전라도 도사에게도 편지를 보내 해남에도 알리게 했다.


 
편지의 왕래는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암일기>가 시작되는 1567년 몇 달만 보아도 유희춘은 쉴새없이 해남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은 결혼과 함께 처가가 있는 담양으로 거주지를 옮겨 가기는 했지만 부모님의 산소가 있고 일가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해남과 더 많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미암 유희춘과 해남윤씨는 사돈관계로 이들은 일상적으로 서로의 안부와 소식을 주고 받았다. <녹우당 소장>
▲ 윤두서 간찰 미암 유희춘과 해남윤씨는 사돈관계로 이들은 일상적으로 서로의 안부와 소식을 주고 받았다. <녹우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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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해남윤씨와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희춘의 딸은 해남윤씨 윤항의 아들인 윤관중에게 시집을 가 해남윤씨와 사돈관계를 맺게 되는데, 유희춘의 형인 유성춘은 윤항의 형 윤구와 함께 호남3걸이라 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다. 이들 지역의 유력한 사족 집안끼리 결혼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 집안은 관직에도 많이 진출하여 서울(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희춘은 서울에서도 해남윤씨 집안사람들과 매우 빈번한 만남을 가진다. 서울과 해남과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자주 왕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1567년 10월 초3일
정언홍의 종이 윤참판의 답장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편지에 이르기를 "전번에 승지 이준민이 강력하게 신원과 방적의 일을 아뢰었는데 이는 오로지 존장과 시생들이 아뢴 것이요 좌의정도 따라서 그 진술을 도와주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안동대도호부사 윤복의 편지를 보니 이미 나를 위하여 삼정전서三程全書를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편지왕래를 통해 해남윤씨가는 유희춘의 해배를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남에는 유배지에서 함께 살았던 첩이 살고 있었다. 첩과의 사이에는 딸 넷이 있었다. 유희춘은 첩에게도 매우 각별하게 대해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러가지 일들을 챙겨 준다.
 
유희춘과 첩 남원방씨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유희춘은 첩에게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등 잘 대해주었다. 담양군 대덕면 유희춘 무덤 옆에 있는 남원방씨 무덤.
▲ 유희춘의 첩 남원방씨 무덤 유희춘과 첩 남원방씨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유희춘은 첩에게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는 등 잘 대해주었다. 담양군 대덕면 유희춘 무덤 옆에 있는 남원방씨 무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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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서울에 있을 때 유희춘은 해남의 일가친척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한다. 담양에 부인 송덕봉이 있었지만 첩은 유희춘에게 편지를 수시로 보내며, 송덕봉은 첩에게 옷감을 지어 유희춘에게 보내게 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원만했던 것 같다.
 
1568년 6월 13일
해남의 윤근이 첩의 편지와 의복을 가지고 왔다. 첩이 예복 한 벌, 모시 내복 한 벌을 지어 보냈다. 이는 담양의 아내가 옷감을 첩에게 보내 첩더러 이곳으로 지어 보내게 한 것이다.

1569년 6월 초7일
병사 이대신이 쌀과 콩을 해남누님 집과 첩의 집에 보내고 아울러 윤서, 이유수, 오언상을 초대 했으며, 또 벼 넉섬을 첩의 집에 보내주었다.


 
담양군 대덕면 유희춘의 무덤 옆에는 첩 남원방씨의 무덤이 있다. 이들의 관계가 결코 아주 불평등하거나 소원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지는 가족간의 안부를 묻고 지방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태그:#유희춘, #간찰, #편지, #첩, #경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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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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