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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와 해남을 오가며 늘 바라보던 숙승봉은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다. 상서로운 봉우리에 강한 기운을 내뿜는 저 우뚝 솟은 바윗덩이가 내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청해진을 형성한 기운이 이곳에서 감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지난해 완도의 섬들을 탐방하며 느낀 것이 많다. 완도는 섬마다 독창적인 자원이 많이 형성되어 있다. 권역별 테마를 정할 만큼 무수한 자원을 그동안 완도의 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섬은 척박하고 문명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왔던 생각이 단번에 바뀌게 된 것은 바로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자원의 풍성함을 자연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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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완도 초입의 달도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는가 하면 죽청리뿐만 아니라 신지도 고금도 약산도평일도 소안군도 청산도 저 멀리 여서도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문화유산이 고루 분포된 곳이 완도이다.

고대부터 완도의 섬들은 해양세력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 증거가 뚜렷이 유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선조들은 그 중요성을 미리 알고 기록에 남기기까지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소남 김영현 선생의 <청해비사>와 <진한국마한사>인데, 마한의 역사에 관한 그의 연구는 지금 보아도 실로 대단한 기록의 가치로 여겨질 뿐이다.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 해양문화 연구로

조선대륙에 고조선이 들어서고 나서 많은 소국이 주변에 생겼다고 전한다. 그 후, 고조선 유민들은 해안지대를 통해 마한으로 유입되었다. 조선대륙에는 한(三韓), 부여, 비류,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 맥 등의 나라가 있었다. <중략> 제왕운기 한사군급열국기에서는 이 나라들을 모두 단군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고인돌과 무문토기(민무늬) 사회의 사회적인 구조가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한 곳이 호남지역이었다. 고인돌에 묻힌 사람이 그동안 연구자의 주장에 따라 족장이나 우두머리라고 여겨왔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게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무덤을 쓴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공동체 사회가 상당한 시간을 호남지역에서 번성했는데, 그 영향력은 완도의 섬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들은 대양을 주 무대로 항해하는 사람들이었고, 완도의 바다는 그 세력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요한 항로 역할을 했던 것. 

그런데 우리는 왜 마한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중국 고서에는 우리나라 삼한(마한, 변한, 진한)에 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우리 고유의 역사를 없애버렸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곤 한다. 멀게는 단군에서부터 우리의 역사가 출발해야 하는데도 식민사관론자들에 의해 단군의 역사가 신화 속에 갇힌 인물로 부정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역사를 신화로만 여겨왔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온 우리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오던 분이 이곳 완도에 계셨다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 그분이 바로 소남 김영현 선생이다.
 
완도 항일의 아버지 소남 김영현 선생
 완도 항일의 아버지 소남 김영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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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김영현(1883~1971) 선생은 고금도 청룡리 용지동에서 침천 김광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고금도에 유배 온 이도재공을 만나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도재는 해배 뒤 전라관찰사가 되어 완도군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김광선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향도유사가 되어 완도군 설군과 완도향교 건립을 주도했다. 그리고 소남 선생은 불목리에 정착한 후에 고금보통학교에서 신교육을 실시했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 목포지국 기자로 일하다가 완도에서 소비조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동지들과 벌인 '완도는 완도사람들이 지켜야 한다'는 계몽운동은 일본 상인들이 피해를 보아 소남 선생은 검거되어 1심에서 징역 3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청해비사>와 <진한국마한사> 등을 저술하며 여러 제자를 배출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은 1958년 원불교에 귀의하여 불목교당을 설립했다. 1964년에 전답 1만 6천 평을 원불교에 희사하여 현재의 소남훈련원이 만들어졌으며 청소년수련장은 우리나라 청소년수련원의 시원이 됐다. 선생이 추구한 교육 계몽사업은 항일 의식 고취라는 시대적 소명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류평등을 추구했던 것. 

소남 선생, 고대 해상왕국 마한을 깨웠다

지난 2011년 완도문화원은 마한사와 관련한 책을 현대판으로 발행했다. 1963년 소남 선생은 <진한국마한사>를 한정 발간했는데, 그 원본이 소실되어 찾아보기 어렵고 한자로 되어 한자 뜻을 본문 서체 교정과 문헌들을 해석하여 현세대가 부담 없이 구독할 수 있도록 편집해 각 기관에 배포하여 지역 향토사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펴냈다.

일제의 탄압과 6.25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선조들이 남긴 건물과 서책들이 많이 소실되어 후세들이 역사의식이 낮았던 원인을 질책하면서 지역사회가 큰 뜻을 모은 것.

<진한국마한사>는 소남 선생이 중국 고서와 다양한 역사서를 섭렵하고 집필한 인문서인데, 선생은 평소 한국 고대사에 주체적인 인식과 깊은 관심으로 삼한시대의 역사와 고대언어 활용법, 종교 등에 관해 독창적인 의견을 결정하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만들어 냈다.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마한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각 지자체가 앞다퉈 지역 향토사를 연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지만 완도군은 조용한 분위기다. 

우리나라 해양문화는 완도군이 자원 삼아야 할 큰 이슈이다. 선조들이 쌓아 올린 명성에 걸맞게 지금이 완도만이 가지고 있는 해양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릴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시대를 앞서 지역의 문화유산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던 선조들의 혜안(慧眼)은 앞으로 완도군의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한사를 집필하면서 숙승봉을 바라보며 소남 선생은 또 무슨 상념에 잠기셨을지 저 떠오르는 달빛에 아련함이 머문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큐사진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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