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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양림동 양림산에 조성된 선교사 묘역. 110여 년 전 광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온 푸른 눈의 성자들이 잠들어 있다
 광주 양림동 양림산에 조성된 선교사 묘역. 110여 년 전 광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온 푸른 눈의 성자들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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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낮고 가난한 곳, 아프리카의 남수단으로 떠난 한국인 선교사 故 이태석(1962~2010) 신부. 4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전쟁으로 신음하던 오지의 땅 수단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사랑으로 봉사했던 이야기를 다뤘던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Don't Cry for Me Sudan)>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의사로서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종교인의 길을 선택해 이국의 땅에서 몸소 사랑을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종교와 종파를 떠나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태석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110여 년 전에 광주의 가장 낮고, 가난한 곳으로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에 앞서 병들고 아픈 이들을 위해 병원을 짓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지었다. 절망으로 신음하던 땅에 교회를 지어 희망을 심어줬다.

광주 사람들보다 더 광주를 사랑했던 성자(聖子)들은 이름마저 한국 이름으로 바꾸었고 죽어서도 광주에 묻혔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역병이 지속되면서 단절과 고립이 가속화되고 세상은 점점 각박해져만 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와 사랑을 실천했던 이방의 성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서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의미의 '헌신과 나눔'이란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고난의 언덕에 묻힌 '푸른 눈의 성자들'

광주광역시 양림동.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맨 먼저 정착한 곳으로 이들과 함께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그들이 지은 학교와 병원, 교회가 있다. 광주 기독교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양림동은 지금도 주민들의 약 6할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몸소 사랑을 실천했던 그들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고난의 길. 순교자들의 고난을 느껴보라는 의도로 조성된 길이다. 디딤돌 하나하나에 이 땅에서 순교한 성자들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고난의 길. 순교자들의 고난을 느껴보라는 의도로 조성된 길이다. 디딤돌 하나하나에 이 땅에서 순교한 성자들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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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신학대학교 뒤편에는 그들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는 양림산이 있다. 해발 108m로 굳이 산이라기보다는 높은 언덕에 가깝다. 조선시대 관아에 화살대를 납품하는 '관죽전'이 있었고 아이들이 돌림병에 걸려 죽으면 내다 버리는 풍장터가 있었다.

110여 년 전 이곳에 정착한 푸른 눈의 성자들은 '죽음의 산'에 나무를 심고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지어 '생명의 산'으로 바꾸었다. 광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제중병원(현 기독교 병원)과 수피아 여학교와 숭일학교를 지어 근대화에 이바지했고 교회를 지어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천사들은 마침내 그곳에 잠들었다.

낯선 땅에서 거룩한 사랑을 실천했던 천사들을 상기하며 양림 동산에 자리한 선교사 묘역에 오른다. 호남신학대학교 정문을 통해 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지나면 뒤편으로 약 100여m 정도 긴 나무 계단이 나온다.
 
묘역 맨 위쪽에 설치된 미국 남장료교회의 문장
 묘역 맨 위쪽에 설치된 미국 남장료교회의 문장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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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계단에 이어 길은 다시 불편하게 놓인 디딤돌로 이어진다. '고난의 길'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식을 잃고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과 850여 명의 호남지방 '순교자들의 고난을 느껴보라'는 의도로 조성된 길이다. 디딤돌 하나하나에 이 땅에서 순교한 성자들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돌계단이 끝날 즈음, 수수하지만 결코 누추하지 않고 그리 엄숙하지도 않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묘원이 추모객을 맞는다. 이 묘역에는 1895년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 나주,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헌신적 사랑을 실천하다 순교한 23명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와 가족들의 묘가 있다.
 
서울과 충청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 중 순교하여 서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선교사들의 묘비를 동일한 모양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서울과 충청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 중 순교하여 서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선교사들의 묘비를 동일한 모양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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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22기의 묘비가 추가로 세워졌다. 서울과 충청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 중 순교하여 서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선교사들의 묘비를 동일한 모양과 크기로 재현해 놓아 지금은 총 45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안쪽에 선교사들의 사진과 그들의 활동내역이 담긴 전시물이 있다. 뒤쪽에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은 850여 명의 호남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광장'도 조성되어 있다.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과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의 묘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과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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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의학과 교육의 선구자 오기원과 배유지

광주의 골고다 언덕, 양림 동산에 묻힌 천사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몇 명의 성자가 있다. 묘역 오른쪽 가장자리에 '오 목사'라고 커다랗게 쓰인 묘비 아래 누워 있는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 그 뒤편에 있는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 묘역 맨 앞줄 한가운데 자리한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이 그들이다.

양림동 선교사 묘역은 1909년 오웬 선교사가 병으로 순교하자 이곳에 매장하면서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광주 선교부 최초의 순교자 오기원 목사는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31살이 되던 1898년 목포에 도착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 사역을 펼쳤다.

유진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약봉지에 한글로 성경구절을 써서 나눠주며 성경을 가르쳤다. 1904년 유진벨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의료 사역과 복음전도에 힘쓰다 1909년 급성 폐렴으로 소천했다.

양림동 기독교 간호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오웬 기념각'이 있다. 유진벨 선교사는 오웬과 함께 최초로 전라남도에 들어온 선교사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나주 지역에 선교부를 개설하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게 된다. 그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헌신한다.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후 1904년 광주로 올라온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 유진벨과 오웬 가족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올해로 117년 된 양림교회의 시작이다.

유진벨은 양림동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과 의료활동에 힘썼다. 30년간 헌신하던 중 1925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양림동 뒷산에서 영면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의 묘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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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녁 누가 제일 춥겠습니까

서서평은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1912년 32살 처녀의 몸으로 광주에 파견된 선교 간호사였다.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서서평은 할머니 손에 자라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에 어머니를 찾아 미국으로 간다. 미국에서 간호사가 된 후 남장로교회 해외파견 간호사로 선발되어 광주로 오게 된다.

제중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나병 환자들의 치료에 전념했다. 또한 강제 거세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려 한 일제 총독부의 정책에 맞서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과 항의 행진에 나섰다. 이 결과로 소록도 한센병 치료 병원과 요양시설이 탄생했다.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  묘역 기념물에서 촬영.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한국명: 서서평). 묘역 기념물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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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들을 길러내기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현 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 간호부협회'를 창립했다. 평생을 독신 여성으로 살면서 14명의 고아를 양자로 키운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좌우명이 붙어 있었다.

1934년 6월 자신의 시신마저 의학용으로 기부하고 떠난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천여 명이 뒤를 따르며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는 통곡 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2017년에 그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천천히 평온하게>는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110여 년 전 낯선 땅에서 실천했던 천사들의 '섬김과 나눔'을 뒤로하고 고난의 길을 내려온다. 가끔씩 '까악~' 하는 산 까마귀의 울음이 겨울산의 적막감을 더한다. 갑자기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도는 건 차갑게 부는 겨울바람 탓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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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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