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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의 모습. 한국외대 소속 김경준씨가 발견해 제보했다.
 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의 모습. 한국외대 소속 김경준씨가 발견해 제보했다.
ⓒ 조선일보DB/김경준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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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복을 입은 한 여인의 사진이 있다. 머리를 감싼 두건, 양쪽으로 쭉 뻗은 눈썹, 앙다문 입술 그리고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는 눈빛까지. 지금으로부터 94년 전인 1927년 12월 17일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의 모습이다.     

선생은 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등에 폭탄을 던져 건물을 파괴한 독립운동가다. 당시 임신 상태에서 거사를 주도했고 출산 직후인 이듬해(1921)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선생은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후 2심에서 10년 형으로 감형됐다. 1927년 12월 14일 가출옥할 때까지 만 6년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사진은 선생이 출소 직후 조선일보 기자를 만나 인터뷰할 당시 남긴 모습이다.

15일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석사과정 김경준(31)씨는 최근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안경신 선생의 사진을 <오마이뉴스>에 공개했다. 선생의 기사는 1927년 12월 17일 석간 5면에 '팔 년 만에 옥문을 나서니 세상은 상상이외의 별천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김씨는 "안경신 지사의 모습으로 알려진 것은 초상화와 출처 미상의 중년 모습 추정 사진이 전부였는데 기사에는 '가출옥된 안경신 여사'라고 명시됐다"며 "기존의 알려진 그림과 달리 실물로 확인되는 최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번 사진으로 선생의 모습을 온전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어 감격스럽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도 16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알려지지 않은 안경신 선생의 사진이 맞다"라며 "사진을 발견한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이후에도 이런 활동들이 계속돼 안경신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안경신, 이름 석자만 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의 모습으로 알려진 초상화
 독립운동가 안경신 선생의 모습으로 알려진 초상화
ⓒ 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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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공훈록에는 안경신 선생이 1888년 7월 22일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다고 적혔다. 그러나 사망년월일은 '미상'으로 기록됐다. 이 말은 곧 1927년 12월 가출옥 이후 선생 삶이 일절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919년 서른 둘이었던 선생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선생은 평양 서문동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자 누구보다 앞장서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29일간 구류 처분을 받는다.

이후 선생은 보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의 어머니 오신도를 비롯해 최순덕, 안정석, 한영신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 각 군 지역에 지부 설치 작업에 착수한다. 이 단체는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모금해 보내기 위해 조직됐다.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본부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하이에 자리한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는 1년여 만에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돼 조직이 와해된다.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를 통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상하이에 위치한 임시정부로 피신, 1920년에 조직된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광복군총영에 몸담은 선생은 그곳에서 동지들과 함께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1920년 여름, 광복군총영은 대원 13명을 선발해 3개 대로 나누어 밀파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광복군총영은 미국의원 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의 독립의지를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주요 기관에 대한 폭탄거사를 결심,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선생은 제2대에 소속돼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등과 함께 평양에서의 거사를 목표로 활동했다. 당시 광복군총영 제1대는 서울을 목표로 했고, 제3대는 선천과 신의주 방면을 맡았다. 결과적으로 임신 상태였던 안경신 선생이 속한 제2대만 폭탄 의거에 성공한다. 1920년 8월 3일의 일이다.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는 1920년 8월 19일 기사에 "폭탄 사건으로 큰 소동이 일어나 평양 천지가 가히 물 끓듯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경천동지할 의거에 놀란 일제는 선생을 포함해 의거를 일으킨 광복군총영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 이듬해 3월에야 함경도 일대에 은신해 있던 선생을 붙잡는다. 거사 직후 선생의 동료들은 곧바로 만주로 피신했다. 임신 중이었던 선생만 자신으로 인해 동료들의 안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내에 남아 폭탄 한 개를 들고 다음 거사를 도모하던 선생은 붙잡혔고 태어난 지 열흘이 막 지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된다. 이곳에서 선생은 일제에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제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재판정에서 안경신은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며 재판장을 꾸짖으며 항소했다고 한다.

안경신의 사형 소식이 임시정부에 전해지자 김구를 비롯해 동지였던 장덕진 등이 탄원서와 석방건의문을 보냈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생에 대한 형량을 사형에서 10년 형으로 감했다. 그리고 1927년, 선생은 가출옥한다. 조선일보의 기사도 이때 완성된다.

선생은 자신을 찾은 기자에게 "(가출옥에 대해) 특별히 느끼는 바는 없다"며 "별로 한일도 없이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냈다. 옥중에서 상상했던 것과 달리 세상은 너무 달라졌다. 과연 어떤 길을 밟아나가야 좋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옛날에 가졌던 뜻을 그대로 갖고 가려 한다"라고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기자가 '거사를 함께했던 동지 장덕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선생은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이후 선생과 관련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평남도청 폭파범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선생의 흔적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유다. 1920년 평남도청 폭탄 투척 의거를 함께 진행한 장덕진은 4년 뒤인 1924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피살당한다.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의 무후선열제단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 김마리아, 유관순 등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위패 115위 중 3위만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위패이다.
▲ 무후선열제단의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위패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묘역의 무후선열제단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 김마리아, 유관순 등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위패 115위 중 3위만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위패이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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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정부는 선생에 대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후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5월, 국가보훈처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생을 선정했을 당시에도 정부는 사진 대신 머리를 올린 초상화로 대신했다. 지금까지 그와 관련된 모습으로 알려진 것은 그를 묘사한 초상화와 중년 시절의 모습으로 추정된다고 알려진 출처불명의 사진 한 장이 전부다.

1975년 광복절을 기념해 국립서울현충원에 무후선열제단이 세워진 후, 정부는 무후선열제단 47번 위패에 안경신 이름 석자를 새겼다. 무후선열제단은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 있는 제단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거나 후손이 없어 유해마저 찾을 길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안경신 선생을 비롯해 유관순, 김마리아, 이상설, 이위종, 김익상, 오동진 등이 모셔졌다. 정인보, 엄항섭, 조소앙, 박열 등 납북 독립유공자의 위패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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