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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남산예장공원 개장식 겸 이회영기념관 개장식에 참석하며 퇴임 후 첫 공식 행보에 나섰다. 윤 전 총장이 개장식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고쳐 쓰고 있는 모습.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 9일 서울 중구 남산예장공원 개장식 겸 이회영기념관 개장식에 참석하며 퇴임 후 첫 공식 행보에 나섰다. 윤 전 총장이 개장식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고쳐 쓰고 있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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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오는 29일 오후 1시에 서울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권도전을 선언한다.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을 기리는 이곳에서,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항쟁에 떠밀려 직선제 개헌 수용을 선언한 6월 29일에 윤석열 전 총장이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히로히토 일왕(현 나루히토 일왕의 조부)에게 수류탄을 던진 의거와 더불어,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에서 일으킨 의거가 갖는 공통적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시기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동안 왕성했던 독립운동이 침체돼 있었던 때인 동시에 일본제국주의가 전성기로 치닫던 때였다. 일본이 미국 등 서방세계와의 협조 노선을 깨트리고 중국을 단독으로 차지하고자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수립을 선포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점은 일본제국주의 또는 군국주의가 절정을 향해 치고 올라가던 때였다.

이런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 두 청년이 이봉창·윤봉길이다. 이들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 진영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을 같은 편으로 여기던 중국인들도 두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을 동지로 대하며 적극 협력하게 됐다.

만 31세 및 24세의 두 청년이 벌인 의거가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이들이 '폭탄 투척'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침략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향해 자기 몸을 용감히 '투척'했기 때문이다.

만약 1932년 그해에 이봉창과 그 뒤를 이어 윤봉길이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한국 독립운동은 좀더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곧 다가올 1945년 해방의 날을 덜 준비된 상태에서 맞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욱 더 한없이 고마운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4월 29일 거사 당일, 윤봉길은 값비싼 시계를 차고 있었다. 역사 저술가 임중빈의 <윤봉길 의사 일대기>에 따르면, 백범 김구와 아침식사를 함께한 그는 손목시계를 끌러 건네면서 "이 시계는 선생님이 주신 돈으로 일전에 산 것입니다, 6원을 주었습니다"라면서 "선생님의 시계를 보니 겨우 1, 2원짜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런 좋은 시계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시계를 바꾸었다.

안 그래도 24세 청년에게 감동돼 있었던 56세의 김구를 한번 더 감동시키고 홍커우공원으로 나간 윤봉길은 히로히토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하고자 한데 모인 일본인들을 상대로 '도시락'을 던졌다. 오전 11시 40분을 막 넘겼을 때 거사를 단행한 그는 곧바로 자폭을 시도했지만 붙들렸고, 그해 12월 19일 순국했다.

그의 유해가 백정기·이봉창 의사와 함께 고국에 돌아온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맘때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는 그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했고, 6월 29일 오후 1시에 조선불교중앙총무원 주관으로 거대한 추도식이 열렸다. 거국적인 국민장은 7월 7일 오후 1시에 거행됐다.

윤봉길의 꿈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인 의열사.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인 의열사.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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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과 똑같은 파평 윤씨인 윤봉길은 농민운동가였다. 그는 이른바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청년이 공동묘지에 있는 묘표들을 죄다 뽑아 윤봉길에게 갖고 가서 아버지 묘표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일, 윤봉길이 아버지 묘표를 찾아줬지만 청년이 그 묘표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해 통곡을 터트린 일은 많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윤봉길은 저서인 <농민독본>에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라면서 "전 조선 인구의 10분의 8이 논에 밭에 산에 나서고 있"다고 썼다. 이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윤봉길 시대에는 산업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주로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농민은 오늘날의 노동자와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다수의 대중을 위해 헌신과 희생의 길을 택한 그는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노동운동가에 비견될 수 있다.

<농민독본>에는 그가 진보적인 '노동운동가'였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들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농민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 "못난 사람은 농민이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또 농민이 억압받는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외쳤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리인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온다.
 
윤봉길이 말하는 '자유'가 자본과 기업의 자유를 뜻하는 신자유주의의 자유가 아니며, 한국 보수·극우가 말하는 그 '자유'와 거리가 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농민의 자유, 민중의 자유였다.

그는 농민이 주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농민이 피지배자의 처지를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때까지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살아 왔습니다"라면서 "주인이 못 살면 다른 사람도 따라서 못 사는 법"이라고 한 뒤 "우리는 모든 힘을 농민에게 돌려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농민의 힘을 모아 농민이 주인 되는, 다수의 대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보수세력 출사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좌우의 구분을 하자면 윤봉길은 우파보다는 좌파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 언론의 사표로 칭송되는 언론인 송건호는 1976년에 <나라사랑> 제25권에 실린 '윤봉길의 민족사상'에서 "윤봉길의 사상은 놀라울 만큼 진보적"이라며 "그의 농촌계몽은 단순한 계몽운동에 그치지 않고 훌륭한 의미에서 반봉건적·반일제적 민족사상과 통하고 있다"고 한 뒤 "그의 사상은 계보상 동학의 농민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도 싶고, 또 당시 활발했던 농민운동에서 사회과학적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도 추측된다"고 평했다.

그런데 이런 윤봉길을 기념하는 장소에서,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는 인물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2018년 9월 7일에는 촛불혁명 당시의 대통령권한대행인 '미스터 국가보안법' 황교안 전 총리가 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적 시동을 걸었다. 이번 6월 29일에는 보수세력의 기대를 받는 윤석열 전 총장이 대권도전을 선언한다.

윤봉길이 살아있었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태그:#윤석열, #윤봉길, #윤봉길기념관, #2022년 대선, #대권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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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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