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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위기의 종착점이 보이지 않는다. 2015년부터 발생한 난민만 해도 500만을 넘는다. 인플레이션도 살인적이다. 5만 볼리바르였던 최고액권 지폐가 금년 3월 8일부터 20배인 100만 볼리바르로 바뀌었다.

정치적 분열도 심각하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개혁 세력과 그 반대 진영의 대립이 대단하다. 2019년부터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임시대통령을 자처하며 마두로와 대립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이도를 지지하면서 대립을 부추겼다.

국제적 압박도 대단하다. 미국이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메리카대륙 우파 정권들의 회의체인 리마그룹 역시 이 나라를 압박하고 있다.

이 같은 베네수엘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세계적 관심을 끄는 소설이 있다. 5월 7일 한국어로도 출간된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의 <스페인 여자의 딸>이 그것이다. 2019년에 나온 이 책은 현재 26개 언어로 번역돼 있다. 영화 판권도 팔린 상태다. <타임>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고, <포브스>는 작가를 가장 창의적인 100인으로 선정했다.
 
 '스페인 여자의 딸' 겉표지.
  "스페인 여자의 딸" 겉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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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스페인 여자의 딸>이지만, 주인공은 아델라이다 팔콘이라는 38세의 베네수엘라 여성이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팔콘은 신문사에서 편집과 교열을 하면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왔다. 소설은 그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엄마를 묻었다"가 소설 첫 대목이다.

유일한 가족을 잃은 팔콘은 보금자리마저 상실한다. 친여당 좌파 조직원들이 그의 아파트에 무단 침입해 먹고 마시며 춤춘다. 이 여성들은 팔콘의 집을 아지트 겸 창고로 사용한다. 두목 격인 지역 보안관은 나가달라는 팔콘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자 "여기서는 우리가 경찰이야, 우-리-가"라고 대꾸한다. 그들은 베네수엘라를 망가트리듯이 팔곤의 집도 망가트렸다.
 
"집 안에는 똥 냄새가 지독했고, 가구의 반은 사라졌다. 엄마의 옷과 수첩이 담겨 있던 상자들은 헤집어진 채,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보안관이 죄다 망가뜨려놓았다. 내 컴퓨터, 식탁, 변기 뚜껑, 세면대, 전등이란 전등에서 전구를 모조리 빼냈고, 내키는 곳 아무 데나 똥을 싸두었다. 내가 자란 집이 똥통으로 변해버렸다."
 

집을 빼앗긴 팔콘은 우연히도 옆집을 무단 침입한다. 보안관에게 대들었다가 권총 몸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그는 이웃 주민의 치료로 회생했다. 그런 뒤, 문이 잠겨 있지 않은 옆집에 들어갔다가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페인에서 와서 스페인 식당을 경영하던 스페인계 여자의 집이었다. 그 여자의 딸이 죽어 있었다. 스페인 여자가 예전에 죽은 상태에서 그 딸마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팔콘은 아우로라 페랄타라는 이 여자의 사망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팔콘은 거기서 희망을 발견했다. 스페인 여자의 딸을 흉내내면 위기 탈출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똥통' 같은 이 나라를 떠나 스페인으로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그가 '똥통'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어머니와 아파트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때문에라도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뭐든 사려면 큰 돈다발이 필요했다"며 "기름 한 병을 사려면 1백 볼리바르짜리 지폐로 탑 두 채를, 가끔 치즈 한 덩어리라도 사려면 세 채를 쌓아 올려야 했다"고 탄식한다.

치안 문제도 심각했다. 좌파의 약탈과 테러로 거리를 나다닐 수 없었다. "제대로 기능하는 유일한 질서가 있다면 그건 죽이고 빼앗는 기관, 약탈하는 조직이었다"며 "혁명군이 기르고 보살피는, 무질서와 혼란 속에 위장한 숨어 있는 병력"을 그는 치안 부재의 원흉으로 지목한다.

나라가 망가진 원인은 독립운동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1783~1830)를 잘못 계승한 좌파들에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 그는 좌파를 '혁명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 '아이들'이 볼리바르의 혁명을 잘못 계승해 나라를 망쳐놨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들은 선 하나를 그어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믿을 만한 자와 의심스러운 자"들로 분열시켰다고 그는 탄식한다.

그는 그 집 컴퓨터와 앨범 등을 뒤적이고, 예금계좌와 스페인 친척 주소 등을 찾아냈다. 여자에 관한 정보는 뭐든 다 끄집어냈다. 그런 정보들을 암기하면서 그는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어 갔다.

그는 페랄타의 계좌에서 유로화를 인출하고 브로커를 통해 여권을 위조한다. 아홉 살 많은 페랄타의 외모를 흉내내며 헐거운 옷을 몸에 걸친다. 그런 뒤 공항을 통해 '똥통'을 빠져나간다. 스페인 도착 직후의 상황이다.
 
"'좆같은 나라, 다시는 나를 못 볼 거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날 아침,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이겼다. 배에 작살이 꽂힌 채였지만, 이긴 건 이긴 것이었다."
 

소설은 다소 과장되기는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고발한다. 개혁의 부작용으로 국민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데도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좌파 정권을 신랄히 비난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대중의 생존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베네수엘라 정권의 문제점을 고발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소설의 문제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 포퓰리즘의 실패 사례로 거론되는 차베스의 집권 기간에 베네수엘라 경제는 오히려 좋아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999~2013년에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GDP)이 3.4배 이상 증가했다는 통계 결과를 내놓았다.

그랬던 나라가 파국을 맞은 것은 정권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 경제가 석유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의 압박이 대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의 제제 하에서 이 나라 경제가 파탄됨과 동시에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원인이 됐다.

<스페인 여자의 딸>은 이 나라 산업 구조나 미국의 제재가 위기를 조장하는 측면은 건드리지 않았다. 좌파 혁명세력의 무능과 무책임만 부각시켰다. 베네수엘라 위기의 심각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 소설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태그:#스페인 여자의 딸, #베네수엘라 , #차베스, #마두로,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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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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