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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여필종부의 가부장적 삶을 산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16세기 여성 중에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은 시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교적 주체적으로 살았다. 이들처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와 견줄 수 있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 미암 유희춘의 부인 송덕봉(1521~1578)이다.

송덕봉은 남녀 양성평등을 당당하게 누리며 살았던 여성이다. 이는 물론 유희춘의 부인에 대한 각별한 배려와 사랑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당시를 놓고 본다면 상당히 이상향적인 부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문으로 자신의 삶을 일군 송덕봉
 
송덕봉의 시문집으로 여성최초의 개인문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미암박물관
▲ 덕봉집 송덕봉의 시문집으로 여성최초의 개인문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미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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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봉은 오늘날의 여성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휘는 종개로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덕봉'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여성 최초로 개인문집이라 할 수 있는 <덕봉집>도 펴냈다.

송덕봉과 미암은 평생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미암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미암의 아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각별했다. 미암은 1571년 덕봉의 나이 51세 때 처조카 송진을 시켜 그동안 덕봉이 지은 시 38수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덕봉집>을 내줄 만큼 아내의 문학성을 인정하고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는 미암이 부인 송덕봉을 학문적, 문학적 친구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송덕봉은 그녀의 나이 16세에 24세의 미암 유희춘과 결혼한다. 미암은 결혼하기 전 학문을 배우며 해남에서 재지적 기반을 쌓고 중앙 관료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서로 같은 학맥이나 당파적 관계를 통해 혼인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홍주송씨는 여류문인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송덕봉 역시 이 같은 가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미암의 장인인 송준(1477~1549)은 1507년(중종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사로 사헌부감찰, 단성현감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송준의 둘째 딸이 유희춘과 혼인한 송덕봉이다.

홍주송씨 5세손인 송상인은 담양 대덕 무월마을로 종가를 이거했는데 무월마을에서 청심헌공파 19세에 이르기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지금까지 세거해오고 있다. 청심헌공파 종가가 있는 무월마을로 들어서면 '달빛무월마을'이란 커다란 표지판이 반긴다.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전통 있는 농촌마을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어 변화된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마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와도 잘 친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을입구에 홍주송씨들의 세거지임을 알려주는 '홍주송씨세거지'란 표지석이 서 있다.

강인했던 문인이자 여성 선비
 
홍주송씨들의 집성촌으로 농촌 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전통마을에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 담양 대덕 무월마을 홍주송씨들의 집성촌으로 농촌 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전통마을에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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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봉은 성품이 명민하고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여성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송덕봉은 미암이 27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그가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유희춘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살림을 도맡았다. 미암의 19년 유배기간 동안 가정을 지키고 꾸려간 강철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이러한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미암의 종성유배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송덕봉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마친 뒤 40세에 미암의 유배지 종성을 찾아간다. 여성의 몸으로 정말 험난한 여정이었다.

송덕봉이 유배지 종성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시가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이다. 함경북도 종성은 '아오지탄광'이란 그 이름이 주는 막막함 만큼이나 오지 중에 오지의 유배지다.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견딘 미암도 대단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그곳까지 찾아간 것도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희춘이 유배에서 돌아와 송덕봉과 각별한 부부의 정을 나누며 시문을 통해 평등한 관계를 죽을 때까지 지켜온 것은 유배 기간 동안 기다리고 지켜온 부인에 대한 고마움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홍주송씨는 여류문인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송덕봉은 홍주송씨 송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 홍주송씨 집성촌 담양 대덕 무월마을 홍주송씨는 여류문인들을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송덕봉은 홍주송씨 송준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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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은 1575년 10월 담양 창평 수국리에 '삼벽(三碧)'이라는 집을 완성하였는데 이때 미암은 관직에서 물러나 담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송덕봉은 집이 완성된 것을 놓고 미암과 시를 주고 받으며 집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시로 노래한다.
 
임금의 은총이 바야흐로 융성하니 어찌 물러나리오
벼슬을 쉬고 임하에서 정신으로 수양하소서
황금이 궤에 차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 아니니
새 집, 맑은 시내도 한 가지 보배라오. - <미암일기초> 제11책
  
미암은 송덕봉을 학문적, 문학적 친구로 인정하였으며 서로 많은 편지와 시문을 주고 받았다. 송덕봉과 만날날이 머지 않아 기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암박물관
▲ 미암이 송덕봉에게 보낸 간찰(편지) 미암은 송덕봉을 학문적, 문학적 친구로 인정하였으며 서로 많은 편지와 시문을 주고 받았다. 송덕봉과 만날날이 머지 않아 기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암박물관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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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이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담양에 내려와 여생을 함께 하길 원하는 송덕봉의 간절함이 들어 있다. 미암의 오랜 유배생활과 관직생활로 인해 송덕봉은 일생을 통해 미암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토록 바랐던 고향 담양에서 미암과 함께 보냈던 행복한 시간은 아마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고향에서 미암과 함께했던 시간도 잠시 미암은 다시 선조의 부름으로 조정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577년(선조10년) 3월 선조는 미암에게 정2품 자헌대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한다. 미암은 선조의 이런 부름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 이해 4월 하순 아들 경렴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간다.
 
담양 대덕면 비차리 홍주송씨 세거지에 미암 유희춘과 나란히 누워있다.
▲ 송덕봉 무덤 담양 대덕면 비차리 홍주송씨 세거지에 미암 유희춘과 나란히 누워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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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쇠약해진 몸 탓이었을까? 미암은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피로와 열이 나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등 병이 위중하게 되어 결국 5월 11일에는 다시 사직서를 올린다.
미암은 이때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5월 15일 세상을 떠난다. 미암이 세상을 떠난 지 8개월 뒤인 1578년 1월 송덕봉도 향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미암일기>에는 송덕봉이 미암을 잃은 뒤에 상을 치름이 예법에 지나쳐 이듬해(1578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암이 떠난 얼마 후에 송덕봉이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지만 문학적 동지로서 서로 '지우(知友)'라고 여길 정도로 금슬 좋게 지냈던 반려자를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홍주송씨들의 세거지인 담양 대덕 비차리에는 송덕봉이 미암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합장이 아니고 서로 같은 봉분의 크기로 묻혀 있는 것을 보면 평등한 반려자의 삶을 살았던 둘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덕봉과 미암의 관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16세기 사대부의 부부관계는 비교적 서로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개방적이었다. 열린 공간이었고 여성의 힘이 크게 작용한 시대였던 것이다.

태그:#송덕봉, #유희춘, #홍주송씨, #여류문인, #무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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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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