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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청천(聽川) 김진섭은 1903년 8월 24일 전남 목포시 남교동 135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만수, 어머니는 진성 이씨였다. 청천은 4형제 중 둘째였다. 김진섭의 부친, 김만수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었다. 김진섭이 목포에서 태어난 것은, 부친이 목포 감리서(監理署) 관리로 일했기 때문이다. 감리서는 개항장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이다.

전국을 떠돌며 자란 유년 시절
 
청천은 수필 분야의 개척자다. 김진섭은 1929년 <동아일보>에 <수필의 문학적 영역>을 발표하며, 수필의 문학적 정립을 시도했다. 김진섭은 당시 이양하와 함께 우리 수필 문단의 쌍벽을 이뤘다. 이양하의 수필이 서정적.고백적인 데 반해, 김진섭의 수필은 서정적이면서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점이 특징이다.
▲ 청년 시절 김진섭 청천은 수필 분야의 개척자다. 김진섭은 1929년 <동아일보>에 <수필의 문학적 영역>을 발표하며, 수필의 문학적 정립을 시도했다. 김진섭은 당시 이양하와 함께 우리 수필 문단의 쌍벽을 이뤘다. 이양하의 수필이 서정적.고백적인 데 반해, 김진섭의 수필은 서정적이면서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점이 특징이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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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은 <범생기>(凡生起)라는 작품을 통해 부친이 '고명한 한학자'였다고 회고했다. 한학자인 부친 때문인지, 그는 수필 제목을 송(頌).부(賦).찬(讚)으로 짓기도 했다. 목포에서 태어난 김진섭은 일곱 살 때인 1910년,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이주했다. 제주에서 그는 보통학교를 다녔다. 

1913년 아버지가 나주 군수가 되자, 김진섭은 전남 나주읍 금계동 33번지 군수 사택으로 이사했다. 나주 금성관 옆이었다. 그의 형은 훗날 아버지 뒤를 이어, 나주 군수를 지냈다. 공직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김진섭의 가족은 계속 이사를 다녔다. 누군가의 고향이었던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그는 고향에 대한 뚜렷한 기억을 갖지 못했다.

1916년 김진섭은 서울로 올라와 양정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훗날 법학과 문학을 전공하지만, 양정 시절 그는 자신 있는 과목으로 '주판'을 꼽았다. 1920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그는, 같은 해 이수봉(李守奉)과 결혼했다. 

1921년 김진섭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에서 그는 호세이대학(法政大学) 법과에 보궐로 입학했다. 1년 만에 예과로 전과한 그는 1924년, 문학부 독문학과에 입학했다. 호세이대학은 법학 분야로 이름난 학교다. 변호사를 염두에 두고 법과에 진학한 김진섭이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이유는 뭘까? 

"어쩐지 법률이 딱딱해서 염증이 없지도 않던 차에 어느 친구가 동 대학 예과로 같이 들어가기를 종용함을 못 이겨 법대 일 년을 수업한 끝에 예과로 전과하고 말았다. 예과를 마치고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독문학과를 택하고 말았으니, 물론 책권이나 읽자면 독일어도 알아두는 것이 필요했겠지만 그것의 사회적 효용 가치를 생각할 만한 실제적 두뇌는 없었으니, 나는 드디어 변호사도 영어 교사도 중간에 놓치고 만 셈이다." - 진섭 지음, 선안나 엮음 <김진섭 선집 -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현대문학, 2011년 2월, p. 303

김진섭이 처음 입학한 대로 법과를 졸업했다면, 법률가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전공을 바꾼 덕분에, 우리는 '수필 분야 개척자'이자 '도서관인' 김진섭을 만나게 된다. 

한국 번역사의 획기적 사건 
 
1920년대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다. 주로 번역 활동에 힘썼다. 1930년 연말을 맞아 외국어문학연구회 회원이 경성에서 모였다. 왼쪽 앞줄부터 감상용, 정규찬, 김온, 이선근, 유동석, 이하윤이다. 뒷줄 왼쪽부터 정인섭, 김한용, 김진섭, 이형우다.
▲ 외국문학연구회 1920년대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다. 주로 번역 활동에 힘썼다. 1930년 연말을 맞아 외국어문학연구회 회원이 경성에서 모였다. 왼쪽 앞줄부터 감상용, 정규찬, 김온, 이선근, 유동석, 이하윤이다. 뒷줄 왼쪽부터 정인섭, 김한용, 김진섭, 이형우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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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김진섭은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하윤, 홍재범, 손우성, 이선근, 정인섭, 김명엽, 김온, 함대훈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중 와세다 출신 이선근은 훗날 서울대 교수, 문교부 장관을 지낸 후 성균관대와 영남대, 동국대 총장을 두루 거쳤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이선근은, 한국도서관협회 제11대 회장(1973-1977년)을 지내기도 했다. 이선근의 '처세술'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유명해서, '대원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외국문학연구회는 1927년 1월부터 <해외문학>을 창간해 연 2회 발행했다.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의 출현은 한국 번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외국문학연구회가 일본어나 중국어를 통한 '중역'(重譯)이 아닌, 외국문학 작품을 직접 번역하는 '직역'(直譯)의 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번역학'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김욱동은 외국문학연구회와 그 기관지 <해외문학>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국문학연구회를 조직한 것은 문학 예술가들이 일제 식민주의의 문화적 예속에서 벗어나 번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부르짖은 '번역문학의 독립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간한 기관지 <해외문학>은 곧 이러한 번역문학의 독립을 외친 '독립선언서'에 해당한다."

1927년 <해외문학>이 발간된 후, 양주동과 김억, 외국문학연구회 사이에 번역을 둘러싼 지상 논쟁이 <동아일보>를 통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축역(縮譯), 의역(意譯), 축자역(逐字譯), 자유역(自由譯)을 포함, 토착어와 외래어 사용 문제까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학생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에서 활동한 김진섭은 세계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번역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1927년 3월, 김진섭은 호세이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생각지 않게 시작한 '도서관인'의 길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은송이다. 창간호 표지가 눈길을 끈다. 맨 위쪽에 '해외문학'을 뜻하는 '에스페란토'(Cpammata Eswtika)어가 적혀 있다. 표지에 있는 그림은 김온이 작업한 판화다. 김온은 당시 도쿄외국어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
▲ 외국문학연구회(해외문학연구회) 기관지 <해외문학> 창간호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은송이다. 창간호 표지가 눈길을 끈다. 맨 위쪽에 "해외문학"을 뜻하는 "에스페란토"(Cpammata Eswtika)어가 적혀 있다. 표지에 있는 그림은 김온이 작업한 판화다. 김온은 당시 도쿄외국어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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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김진섭은 문학을 통한 '현실 참여'보다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 이런 외국문학연구회를, 카프에 속한 문학인은 경멸하는 투로 '해외문학파'라 불렀다. 김진섭이 활동한 '해외문학파'에 대한 선안나의 지적이다. 

"해외문학파는 카프나 민족주의 문학의 유파와 다르게 어떤 주의주장에도 휩쓸리지 않는 '순수'를 지향하였으나, 그 순수는 한편으로 전통의 기반 없는 외국문학의 이식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시절 김진섭은 문학에 심취하며 술도 즐겼다. '일승회'라는 술 마시는 모임을 만들고, <주찬>, <주중교우록>, <속 주중교우록>, <취인감허>처럼 술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여하간 한 잔 들어가면 어쩐지 즐겁다. 또한 한 잔 들여보내는 데 많은 방도가 존재한다. 좋도다! 이리하여 우리는 항상 술잔을 드는 것이다. 슬퍼서 마시며, 기뻐 마시며, 분하다 하여 마시며, 봄날이 따습다 하여 마신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주(酒)의 공덕이라 하나, 이 또한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 술 속에 진리가 있다)가 아니냐! 되고자 하는 자기에 비로소 도달한 우리는 술 가운데 처음 세계의 완전을 보는 것이다."

술을 좋아했던 김진섭이 술에 '절어' 엉망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밤을 새워 함께 술을 마셔도, 껄껄 웃음소리와 함께 취태(醉態)가 없었다는 월탄 박종화의 회고가 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김진섭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북 고개를 넘었다. 언론인이었던 석천(昔泉) 오종식(吳宗植)은 김진섭의 수필보다 그의 인품을 높이 산다고 평하기도 했다.

1927년 조선으로 돌아온 김진섭은 경성부 재동(지금의 종로구 재동 60번지)에서 1년 정도 하숙을 했다. 1928년 6월부터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촉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1928년 6월 12일 임시 사무 촉탁으로 임명되었다가 1929년 2월 28일 촉탁으로 발령받았다.

식민지 유일의 대학도서관,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1927년 호세이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진섭은, 후배 권진충과 경성부 재동에서 1년 정도 하숙을 했다. 이 하숙집에 머물던 무렵인 1928년,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 김진섭 하숙집 집터 1927년 호세이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진섭은, 후배 권진충과 경성부 재동에서 1년 정도 하숙을 했다. 이 하숙집에 머물던 무렵인 1928년,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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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구한 후 김진섭은 나주에 있던 아내와 살림을 합쳤다. 그는 어떻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일하게 된 걸까? <범생기>라는 작품에 그 사연을 남겼다. 

"스물다섯에 대학을 졸업하고 일 년을 집에서 놀며 생각하니 대단히 억울하여 이력서를 단 한 번 써서 낸 곳이 성대(城大) 도서관인데 불행히도 채용되고 말았다. 공부나 해볼 작정으로 얼른 들어간 것이 함정이 될 줄이야 몰랐다. 공부 안 되는 사실을 들어간 첫날에 깨닫고 그날부터 그만둔다는 것이 어언간 10년이 지나도 내버리지 못하고 있다."

'성대'(城大)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약칭이다. 공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첫날 깨달은 김진섭이 도서관에서 불성실하게 근무했을까? 김진섭은 1931년 2월 발족한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선도서관연구회는 1926년 3월 창립한 '경성도서관연구회'가 발전한 단체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유일한 도서관 단체였다.

일본인이 다수였던 이 단체에서 김진섭은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는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활동했다. 김진섭은 193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열린 도서관대회에도 참가했다. 참석자 명단에 김진섭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가 도서관 단체와 행사에 꾸준히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제국대학 졸업생이나 일본 유학생을 '촉탁'으로, 조선에서 전문학교 나온 사람을 '고원'으로 고용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나온 이봉순은 '고원'으로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1928년, 그는 첫 딸 정교(正嬌)를 낳았다.

그러면 김진섭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최초로 근무한 조선인이었을까? 김진섭보다 앞서 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이 있다. 박정식(朴政植)은 1926년 5월 10일 고원으로 임명되어 1927년 촉탁으로 승진했다가, 1930년에 도서관을 그만두었다. 식민지 조선의 대학도서관에서 최초로 일한 조선인은 김진섭이 아닌 박정식이다. 

생활인과 비생활인 사이에서
 
1935년 경성에서 열린 도서관대회는, 일본제국 안 도서관인이 모이는 큰 행사였다. 당시 조선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도 이 대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김진섭도 193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로 열린 경성 도서관대회에 참가했다.
▲ 경성 도서관대회 기념사진 1935년 경성에서 열린 도서관대회는, 일본제국 안 도서관인이 모이는 큰 행사였다. 당시 조선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도 이 대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김진섭도 193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로 열린 경성 도서관대회에 참가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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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김진섭은 <동아일보>에 <수필의 문학적 영역>을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그는 문학에서 수필의 고유한 영역을 정립했다. 1958년 김진섭의 작품을 모아 유고 수필집을 출간한 월탄 박종화는, 김진섭의 수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청천 김진섭 형이 <인생예찬>을 세상에 내놓고, <생활인의 철학>을 출판하고 <문학인의 교양>을 간행한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참다운 수필 전문가의 명예를 청천(聽川)에게로 돌렸다."

김진섭이 수필가로 명성을 날린 이유는 뭘까? 그의 수필 작품은 어떤 점이 달랐을까? 김진섭은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일상을 소재로 사상과 철학이 담긴 글을 썼다. 김진섭은 <백설부>, <매화찬>, <생활인의 철학>처럼 수준 높은 수필 작품을 100편 이상 꾸준히 발표하며,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높였다. 질적으로도 뛰어났지만, 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김진섭이 수필 분야 '태두'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수필에 대해 칭송만 있는 건 아니다. 이정림은 "생활의 체험이 제시되지 않고, 작가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수필"이고, "인생.생활.인생 사업에 대한 김진섭 자신의 방관자적 태도는 서양에 대한 문화적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에서 김진섭 작품을 "생활하면서 겪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정색을 하고 길게 논해 사상이 있고 철학이 깃들게 하려고 했고, 논설거리가 되지 못할 대상을 두고 쓴 논설"이라고 평했다. <비(非) 생활인의 철학 - 김진섭론>을 쓴 김윤식의 비판도 신랄하다. 

"관념일 때만 아름답다. 병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과연 <백설부>는 서정시일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살리려면 생활을 '한없이 멸시, 제거, 거부'할 때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서>(自序)에서 '생활에 대하여 한없는 애착과 존경을 갖는 자'라 주장한 것과 얼마나 모순되는가! 이것이 아이러니의 정체이다. 생활의 철저한 멸시를 통해 생활에 한없이 애착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법론인 것이다."

- 2편
조선군사령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대학도서관 사서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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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 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춘기 딸과 고양이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합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 하다 지금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썼습니다. sugi95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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