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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덕에 컨디션이 안 좋던 날, 의사가 된 아이가 써준 처방전
▲ 만병통치 처방전 날씨 덕에 컨디션이 안 좋던 날, 의사가 된 아이가 써준 처방전
ⓒ 진실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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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치원에서 일하면서, 내 어릴 적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이 시절의 기억은 몇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맞벌이셨던 부모님은 주말에도 가게를 열어야 할 때면 우리 삼 남매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 종종 맡기곤 하셨다.

아직도 머릿속에 할머니 집 가는 고속도로, 할머니 집 담장, 집 주변 우거진 나무들과 강이 새록새록 생각 난다. 우리를 그 곳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가던 아빠는 늘 같은 레퍼토리로 우리에게 '거짓 약속'을 했다.

"잘 놀고 있어. 빨리 데리러 올게." 아빠는 항상 같은 말로 우리에게 기대와 희망을 안겼지만, 한 번 두 번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우리는 뒤늦게야 알았다. 우리가 이곳에서 노는 동안, 아빠는 빨리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약속의 허무함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할머니 집에서 라디오만 켠 채 지새우는 밤이 꽤 싫었다. 우주에 혼자 내동댕이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동생들, 할머니, 할아버지도 옆에서 쌔근쌔근 잠을 잤지만, 그 어떤 것도 당시 내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얄미운 약속을 하고 갔던, 아빠 엄마만 보고플 뿐이었다.

그런데 한 해 한 해 성장을 하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 시절 엄마 아빠를 이해하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질 때가 있다. 엄마 아빠는 내 마음이 안 다치도록, 내가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그 약속을 매번 새로운 다짐처럼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게도 아이들에게 (상상이 가미된) 거짓말을 하는 건 그들을 위한 선의의 행동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 판단으로 일하는 초반에는 아이들하고 한참 재미있게 놀다가도 쉬는 시간이 다가오면, '잠깐만 다녀올게' 말을 에두르며 자리를 떴다. 퇴근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적으로 아이의 놀이 교육의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동반 놀이가 필수인 아이에게 또 다른 자극을 제공하고 싶지 않았던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보통 상상하는 바로는 내가 떠날 기미를 보이면, 아이는 놀이에 대해 몰두하던 순간을 금세 잊어버리고 가지 말라며 떼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리저리 돌려 말하며 내 상황을 포장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달랐다. 어느 날은 그룹에서 할아버지 부고 소식을 들은 동료가 침통해하자, 다른 동료들이 달래는 사이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깜짝 놀란 아이들에게 동료는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이의 떠남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슬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연신 우는 동료를 안아주며 토닥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나 퇴근 할 때에도 동료들은 아주 자연스레 아이들에게 매번 "우리는 이곳에서 너희와 다르게 일을 하는 사람이란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 필요한 거야. 너희들의 낮잠 시간처럼. 우리는 그리고 주말을 기다려~!"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다가도 휴식이나 퇴근의 의미를 이해하곤 밝게 인사를 보낸다.

"그래. 내일 또 만나요!" 매일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이제껏 나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내 안에 아이들을 그저 어리기 때문에란 생각 혹은 어른처럼 사고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선의처럼 꾸며온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칼 로저스의 <인간중심 상담론>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실습을 많이 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태도가 공감, 가치평가, 진실성(솔직)이다. 나는 다른 개념보다도 '진실성'이 어떻게 적용되야할지 고민스러웠다. 정말 아이들에게 이것이 좋은 태도일까란 질문이 늘 따라왔다. 하지만 내가 아이에게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의 잠재력을 믿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더불어 그 아이의 성장 과정의 동반자로서 함께한다는 책임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피곤한 날 하품이 쩌억 나올 적, 내 컨디션을 숨기지 않고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어제 학교 과제하다가 늦게 잤더니 피곤하네.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이는 옆 구르기를 시전하며 이렇게 해보라고 한다. "그러게, 완전 피곤이 달아나겠는 걸!"

오늘도 일터를 떠나며, 아이들에게 밝게 인사한다. "애들아 나는 먼저 집에 갈게. 네 엄마도 금방 오실거야. 내일 만나자!" 떠나는 나를 덥썩 안아준다며 아이들이 달려온다. 나의 수고를 칭찬하는 듯, 아이들의 포옹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 나는 이곳의 노동자로 왔지만, 너희들의 변함없는 친구이자 성장의 동반자 그리고 좋은 본보기의 교육자로서 이렇게 진실로 마주하면서 오래 함께 갔으면 좋겠다.

태그:#독일, #보육교사, #아동교육, #아우스빌둥, #직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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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국문학+시민정치문화를 전공했고, 현재는 독일 중서부 뒤셀도르프에서 유아 청소년 교육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동기관에서 재직중입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의 일에 관심이 많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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