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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 당간지주
 숙수사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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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 들어가면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울창하다. 소나무길이 끝나는 곳에 숙수사(宿水寺) 당간지주가 있다. 당간지주를 통해 이곳에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까지 죽계천(竹溪川) 옆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순흥지>에 따르면 "숙수사는 영귀산(靈龜山) 아래에 있었다. 숙수루(宿水樓)가 있었으니, 바로 주신재(周愼齋)가 백운서원(白雲書院)을 세운 곳이다." 주신재는 신재 주세붕을 말하고 백운서원은 백운동서원을 말한다.
 
죽계천
 죽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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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과 숙수사를 노래한 이가 있다. 고려 말의 안축(安軸: 1282~1348))이다. 그는 고향 순흥의 풍경을 <죽계별곡>이라는 경기체가로 남겼다. <죽계별곡> 1장에서 죽령과 소백산을 노래하고, 2장에서 그 남쪽 죽계천 주변에 있는 절에서 노니는 모습을 노래한다.
 
숙수사 누각 복전사 누대 승림사 정자 宿水樓 福田臺 僧林亭子
초암사 욱금계 비로전 부석사 취원루에서 草菴洞 郁錦溪 聚遠樓上
반쯤 취하고 반쯤 깨서 붉고 흰 꽃이 피고 산에 비 내리는 가운데
半醉半醒 紅白花開 山雨裏良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거 어떻겠습니까? 爲 遊寺 景幾何如
 
광배
 광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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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절 중 숙수사, 복전사, 승림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숭유억불정책으로 절들이 하나둘씩 없어졌고, 숙수사 자리에는 백운동서원이 들어선 것이다. 그나마 서원 입구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서원 뒤편 관리사무소 앞쪽 정원에 석등, 광배, 주초석, 팔각기둥 등이 진열되어 있다. 이들을 버리지 않고 유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경렴정과 취한대에서 만난 옛 선인의 글
 
황기로가 쓴 경렴정
 황기로가 쓴 경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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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죽계천 높은 곳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을 살펴보고 지도문(志道門)을 통해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죽계천 돌다리를 건너 취한대(翠寒臺)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경렴정을 먼저 살펴보고, 죽계천을 건너 취한대로 가려고 한다. 죽계천을 따라 올라간 다음 백운교를 건너 소수서원 후문으로 들어와 강학당과 사당을 살펴보려고 한다.

경렴정은 1543년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의 유식(遊息)공간으로 세웠다. 유식이란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곳을 말한다. 경렴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염계(濂溪) 주돈이를 우러러본다는 뜻을 지닌다.

경렴정에는 편액이 두 개 걸려있다. 그 중 해서체를 퇴계 이황이 썼고, 초서체를 퇴계 문인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가 썼다. <순흥지(順興誌)> 학교 편 '경렴정'에 정자의 유래가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주세붕의 시가 실려 있다.
 
경렴정: 이황의 글씨가 걸려 있다.
 경렴정: 이황의 글씨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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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문밖 동쪽 절벽 위에 있다. 주세붕이 세웠다. 연화봉(蓮花峰)을 마주 대하고 취한대(翠寒臺)를 굽어보고 있다.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아래엔 맑은 못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경(敬)' 자가 못 가운데(潭心) 어린다. 난간에 기대어 감상하노라면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고, 소쇄(瀟灑)한 정취에 그윽히 잠기게 된다. 실로 골짜기 속에서 아름다운 곳이다."

산은 경건한 빛으로 서 있고             山立祗祗色
시내는 끊임없이 소리 내어 흐르네.    溪行亹亹聲
한가히 노니는 이 느끼는 바 있어      幽人心有會
한밤중에 외로운 정자에 기대어 서네. 半夜倚孤亭
 
취한대(翠寒臺)
 취한대(翠寒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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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대는 죽계천을 사이에 두고 경렴정 건너편에 있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를 만든 다음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취한이라는 이름은 그의 시구에서 한자씩 취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대나무와 잣나무는 없고 소나무만 취한대를 감싸고 있다.
 
가시덩굴 제거하고 푸른 벽 열어      試除荒棘開蒼壁
평평한 대 만드니 푸른 기운 감도네. 規作平臺挹
춘삼월 아이들 모아 시 읊기 좋고     正好冠童春暮月
추운 겨울엔 송백을 잊지 못하겠네.  無忘松栢歲
 
문성공묘와 강당 그리고 사재(四齋)
 
문성공묘
 문성공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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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묘는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나중에 안보와 안축을, 그리고 주세붕을 추가 배향해 모두 네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성공 안향선생을 주향으로 하고, 문경공 안보와 문정공 안축을 좌우로 배향했다.

문민공 주세붕은 문정공 앞에 추가 배향되었다. 문성공묘처럼 서원의 사당에 시호가 들어가고, 사(祠) 대신 묘(廟)를 쓰는 경우는 드물다. 문성공묘는 제향일인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만 문이 열린다.

장서각은 도서를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문성공묘 동쪽에 있다. 3000여 권의 장서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그중에는 어제(御製) 내사본도 있다고 한다. 장서각 앞에는 정료대(庭燎臺)와 관세대(盥洗臺)가 있다.

정료대는 밤중에 불을 밝히는 등대(燈臺)로 지금으로 말하면 가로등이다. 관세대는 문성공묘에서 제를 지낼 때 손을 씻는 대야가 놓인 자리다. 장서각 뒤 동쪽에는 일영대(日影臺)가 있다. 일영대는 해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던 해시계다.
 
문성공묘(왼쪽)와 강당(오른쪽)
 문성공묘(왼쪽)와 강당(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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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중심건물은 사당인 문성공묘와 강당이다. 강당은 백운동과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강학당으로도 불린다. 강당은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강당 안에는 백록동서원규(白鹿洞書院規)와 세 개의 잠(箴)이 있다. 백록동서원은 백운동서원이 모범으로 삼은 중국의 서원으로, 그 원규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세 개의 잠은 사물잠(四勿箴), 심잠(心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다. 사물잠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방법으로 공자가 제시한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말라"는 말을 상세히 풀어쓴 잠언이다. 심잠은 욕심을 버리고 잡념이 없어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말한다. 숙흥야매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을 가르치고 있다.
 
학구재와 지락재
 학구재와 지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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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강당 뒤에는 네 개의 건물이 있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로, 지금으로 말하면 교무실과 기숙사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원장실, 교무실, 숙소로 사용되었다.

직방은 곧고 바름을 상징한다. 직방의 반대말은 건방(乾方)이다. 일신재는 1799년 서원장 성언근(成彦根)이 늘려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일신은 매일 새로워짐을 의미한다.

지락재는 지극한 즐거움에 이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극한 즐거움은 <명심보감>에 나오는 것처럼 독서를 말한다. 지락재의 다른 이름은 앙고재(仰高齋)로, 옛것을 우러러 배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학구재는 '학구성현(學求聖賢)'에서 나온 말로 성현의 가르침을 구해서 배운다는 뜻이다. 학구재의 다른 이름은 동몽재(童蒙齋)로, 어리석은 아이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덧붙이는 글 | 소수서원은 1543년 백운동서원으로 창건되어, 1549년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는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으나, 1888년 마지막 원생을 받고 그 소임을 다 한다. 1963년 소수서원이 사적 제55호로 지정되며 보호를 받기 시작했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면서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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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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