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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촌 사랑마을은 인천 유동 14-5번지 일대로 인천에서 최초로 2층 양옥들이 세워진 곳이다.
 월남촌 사랑마을은 인천 유동 14-5번지 일대로 인천에서 최초로 2층 양옥들이 세워진 곳이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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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구 유동 14-5번지 일대엔 2층 양옥들이 모여있다. 빨간 벽돌로 지은 담장에 내부는 타일로 꾸며 멋을 낸 집들이다. 이곳 2층 양옥들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나란히 조성돼 있다.

'월남촌'이라 부르는 이 동네에 인천 최초로 2층 양옥이 지어졌다. 1970~1980년대 택시 타고 '월남촌 갑시다' 하면 기사들이 다 알아서 모셔다 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한 부자동네였다.

70~80년대 택시기사들도 알아주던 부자동네

월남촌에 양옥이 생기게 된 배경이 있다. 1966년 한진과 미군사령부가 맺은 운송계약으로 베트남에 일하러 갔던 근로자들이 돈을 벌어 이 동네에 2층 양옥을 지으면서였다. 당시 이곳은 호박밭과 초가집, 슬레이트지붕의 판잣집들이 즐비했으나 현대식 양옥이 들어서자 동네 주민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때 50여 채의 2층 양옥단지가 지어졌고, 양옥의 표본이 되어 다른 동네로 퍼져나갔다.
 
월남촌 사랑마을에 남아있는 2층 양옥들. 이 집들은 빨간벽돌을 담장을 세우고 내부는 타일로 꾸며 한껏 멋을 살려 지었다.
 월남촌 사랑마을에 남아있는 2층 양옥들. 이 집들은 빨간벽돌을 담장을 세우고 내부는 타일로 꾸며 한껏 멋을 살려 지었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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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촌 사랑마을에 남아있는 2층 양옥들. 이 집들은 빨간벽돌을 담장을 세우고 내부는 타일로 꾸며 한껏 멋을 살려 지었다.
 월남촌 사랑마을에 남아있는 2층 양옥들. 이 집들은 빨간벽돌을 담장을 세우고 내부는 타일로 꾸며 한껏 멋을 살려 지었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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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부자동네로 알려진 월남마을은 이제 인천의 원도심 중 하나가 됐다. 동네 풍경은 1970-1980년대로 시계추를 돌린 듯하다. 30~40년 된 오래되고 낮은 집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고, 전봇대에서 나온 전기선들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동네 하늘을 어지럽힌다. 노인들이 많이 살지만 그들의 힘든 노구를 잠시라도 쉬게 할 의자 하나 없었다.
  
월남촌 주변은 서울로 가는 큰 고개인 황골고개를 따라 조성된 황골상가, 전통시장인 신흥시장을 양 끝에 두고 있고, 인근에 광성중·고등학교, 정보산업고등학교가 위치하며 주거와 상업지역이 섞여 있는 지역이다.

황골상가는 특수 산업용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하다. 죽제품, 철물점, 특수주방기구를 판매한다. 예전 우각로 밑 경인전철이 복복선으로 다닐 때 그 주변에서 장사하던 상가들이 철거되면서 상인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와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봉암 살았던 부영주택, 일제시대 주명기 정미소

월남촌 사랑마을 주변은 인천의 근대 역사를 품고 있다. 경인지하철 1호선 도원역은 1899년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이 열렸던 쇠뿔고개 자리다. 도원동은 일제시대엔 복숭아나무를 재배해서 '모모산'으로 불렸다. '모모'는 일본말로 복숭아를 뜻한다. 광성중·고등학교 담장 아래엔 인천의 큰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선생이 해방 후까지 살았던 부영주택(府營住宅, 당시 인천부가 지어 분양한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경인지하철 1호선 도원역은 1899년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이 열렸던 쇠뿔고개 자리다.
 경인지하철 1호선 도원역은 1899년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이 열렸던 쇠뿔고개 자리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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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큰 정치인 조봉암 선생이 해방 후까지 살았던 부영주택
 인천의 큰 정치인 조봉암 선생이 해방 후까지 살았던 부영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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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세운 주명기정미소 건물. 교회건물로 사용하다 최근에 헐렸다. (좌)주명기 정미소 건물, (우)주명기 정미소 포대.
 일제시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세운 주명기정미소 건물. 교회건물로 사용하다 최근에 헐렸다. (좌)주명기 정미소 건물, (우)주명기 정미소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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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목할 장소로는 1925년에 세워진 주명기 정미소다. 일제시대 한국인이 세운 두 번째 정미소였으나 최근에 헐렸다.

월남촌 사랑마을은 15년간 재개발지구로 묶여 있었다. 재개발로 동네의 모든 발전, 개발이 정지됐었다. 주민들은 재개발이 되면 동네가 좋아질 것이라 여겨 집도 안 고치며, 불편함을 참고 살았다. 좁은 골목, 부족한 주차 공간, 마을쉼터도 없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이랬던 월남마을이 재개발 지역에서 해제되고 올해 더불어마을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5년간 묶였던 재개발이 취소되자 묶였던 부동산 가격도 올랐습니다. 최근에도 건물 몇 채가 벌써 팔렸습니다. 이 동네의 난개발이 예상됐지요. 동네사람들끼리 의지하고 정을 나누던 마을의 기능을 제대로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더불어마을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신청하게 됐습니다."

심영섭(74) 월남촌 사랑마을 대표가 더불어마을을 신청하게 된 사연이다.

베트남 이주민·이주배경 학생에 교육... 주민과 나누는 마을

심 대표는 "이 동네가 베트남과 인연이 있는 곳이고, 동네 노인들도 월남촌이라는 말을 자주해서 더불어 마을사업 신청 때 '월남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며 "우리가 베트남에서 받았던 혜택을 지금 인천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이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심영섭 월남촌 사랑마을 대표는 이곳이 더불어마을 사업지로 선정된 후 주민들의 쉼터인 ‘월남촌 사랑마을 사랑방’을 만들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심영섭 월남촌 사랑마을 대표는 이곳이 더불어마을 사업지로 선정된 후 주민들의 쉼터인 ‘월남촌 사랑마을 사랑방’을 만들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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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대표는 이곳이 더불어마을 사업지로 선정된 후 주민들의 쉼터인 '월남촌 사랑마을 사랑방'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차도 마시고 교육도 받으면서 월남마을 개발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공유한다. 또 베트남 이주여성 교육과 더불어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트남어 교육도 하고 있다. 결혼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는 베트남 여성들의 자녀들이 베트남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월남촌사랑마을에서는 동네소식을 알리는 소식지 발간하고, 동네 노인들을 위한 벤치, 우체통 등을 설치해 마을의 변화를 알리고, 주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월남촌 사랑마을이 주민들이 참여로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며 정주여건이 좋은 동네로 변신하기를 기대한다.
 
월남촌사랑마을에서는 동네소식을 알리는 소식지 발간했고, 동네 노인들을 위한 벤치, 우체통 등을 설치해 마을의 변화를 알리고, 주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월남촌사랑마을에서는 동네소식을 알리는 소식지 발간했고, 동네 노인들을 위한 벤치, 우체통 등을 설치해 마을의 변화를 알리고, 주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 이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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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태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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