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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랑한 은둔자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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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한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한 알 한 알 음미하며 먹는 것처럼 책장을 한 장 한 장 아깝게 넘기며 혼자만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명랑한 은둔자>는 책장 서랍 깊숙이 넣어 두고 허전하고 외로운 날 친구처럼 만나고 싶은 책이다.

일상적인 모임이 사라지고 사람들을 편하게 만나지 못한 지 1년이 지났다. 평소 모임을 즐기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던 친구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활발하게 모임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외향형의 시대는 가고 혼자도 잘 지내고 소수의 사람들과 깊게 사귀는 내향형의 시대가 온 것 같아. 모임도 약속도 만남도 사라지니 사는 재미가 없어. 그런데 이상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계속 보내다 보니 성가신 모임도 줄고 피곤한 인간관계도 피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 솔직히 그동안 혼자 있으면 소외될까 봐, 외로울 것 같아서 관계에 집착했는지도 몰라."

친구의 말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고 허전하지 않고 나만의 온전한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랑한 은둔자>는 혼자 있는 시간의 의미를 찾아주는 책이다. 남에게 보이는 삶, 과시하는 삶, 비교하는 삶, 허영적인 삶이 아니라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마다 편안한 공간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방어적이거나 타인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분한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내 시간을 맘대로 보내고, 생활 규칙을 알아서 정하고, 내 취향을 맘껏 탐닉할 자유,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하고도 소통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 성취감.
나는 말한다. '이건 선택의 문제, 스타일의 문제야. 그리고 나는 이 스타일이 편해.'
-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금요일 퇴근 후에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싶다. 주말이면 늦잠을 자고 느긋하게 일어나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싶다. 오후에는 햇살 좋은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거나 가벼운 옷차림으로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고 싶다.

밖에 나가기 귀찮은 날에는 하루 종일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거나 만화책을 보며 간식을 먹으며 뒹굴뒹굴하고 싶다. 가끔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저녁에는 술 한잔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편하고 솔직하게 나누고 싶다. 연휴에는 훌쩍 여행을 떠나고 색다른 공간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금요일 밤 과음으로 숙취에 시달리며 토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텅 비어있는 냉장고를 쳐다보며 쓰린 속을 라면으로 달랜다. 오후에는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휴대전화 앱을 켜고 장을 보고 생필품을 주문한다. 오후에는 빨래통 가득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간 미뤄둔 청소를 대충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주중에 다하지 못한 업무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억지로 책상에 앉는다. 배달 음식과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무기력하게 TV 채널을 돌리며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일요일 밤에는 이불을 부여잡고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 

작가 캐럴라인 냅의 삶이 부럽다. 캐럴라인 냅은 울창한 숲이 옆에 있는 집에서 반려견과 함께 전업작가로 살면서 자신의 내면을 찾아간다.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광기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감정을 차근차근 탐색한다.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을 낭비하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기 있고 새롭게 살기 위한 방법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캐럴라인 냅은 사회적 기준이나 남들의 시선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을 추구한다.
 
작가 캐럴니 하일브런은 <시간의 마지막 선물>에서 자신이 삶에서 달성하고자 평생 애써온 이상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사적인 공간이 충분하되 지속적인 교류가 있는' 상태다. 하일브런에게 사적인 공간은 시골의 작은 집이라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교류는 가족과 친밀한 친구들로 충족되었다.
-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일 년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블루라고 부르는 우울증과 소외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면 우리 사회는 관계 중독에 빠져 살고 있다가 금단현상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사회적 관계와 공적 모임 속에서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소비하고 과시하는 삶을 그동안 강요받았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유행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공적으로 소비되고 노동으로 소모되던 시간은 사적으로 깊이 있고 평온한 시간으로 점점 대체되고 있다.

온전히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와 내면의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고립의 시간이 아니라 홀로서기의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내면이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며 내가 원하는 건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록 숲속의 조용한 집이 없어도 나만의 공간에서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명랑한 은둔자>는 역설적으로 명랑하지 않아도 은둔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여준다. 물질적 풍요로 채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시간, 편안한 친구와 산책하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시간, 반려견과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시간, 숲에서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자연에 감사하는 시간, 아늑하게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 시간, 충분히 애쓴 나를 인정하고 다독이는 시간, 남을 배려하고 따뜻하게 다가서는 시간 등.

수많은 순간들이 모두 삶의 소중한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명랑한 은둔자>를 읽다 보면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와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블로그와 브런치에 함께 싣습니다.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은이), 김명남 (옮긴이), 바다출판사(2020)


태그:#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바다출판사, #고독, #정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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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일상 여행자로 틈틈이 일상 예술가로 살아갑니다.네이버 블로그 '예술가의 편의점' 과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그림작가 정무훈의 감성워크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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