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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애관은 인천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에서도 매우 손꼽히는 극장이 된다.(출처 : 1965년 발행 <경기사진대관>)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애관은 인천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에서도 매우 손꼽히는 극장이 된다.(출처 : 1965년 발행 <경기사진대관>)
ⓒ 경기사진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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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이 되면, 애관은 인천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에서도 매우 손꼽히는 극장이 된다. 1938년 2월 한 신문에선 '불경기 모르는 인천의 흥행계'라는 제목으로, 1937년 한 해 동안 인천의 표관과 애관이 영화와 연극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이 상당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애관극장과 관련해 꼭 기록하고 싶은 게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패전했고 조선은 독립했다. 그날 벌써 상인천역 앞 배다리로 가는 전봇대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글씨가 매달렸다. 커다란 쌀가마니에 붓으로 쓴 큰 글씨였다.

며칠 뒤, 인천 사람들은 애관에 모였다. 당시 인천에서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이 거기에 모인 것이다. 경동사거리 (애관) 저쪽에는 일본인이 살았고, 싸리재 이쪽에는 조선인이 살았다.

해방 후, 타 지역에선 조선인과 일본인의 마찰도 있었다. 어질 인(仁)이라서 그런가? 인천은 아니었다. 인천에선 원망과 복수가 없었다. 떠나는 일본인을 위한 송별식이 열렸다. 인천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모여서 '석벽의 정'을 나눈 곳이 애관이다. 매우 아쉽게도 이때를 기록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인천에서 살았던 내 어머니(1930년생)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당시 16세 소녀는 그때를 확실하게 기억하는데, 지금 생존해 계신 원도심 토박이 중에도 이날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을 해 줄 분이 있을 것이다.

애관에서 구경하고 평화각에서 짜장면을
 
1960년대에는 애관에서 영화보고 평화각에서 짜장면을 먹으면 그야말로 횡재한 날이었다.
 1960년대에는 애관에서 영화보고 평화각에서 짜장면을 먹으면 그야말로 횡재한 날이었다.
ⓒ 부극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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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반평생을 사셨던 외할머니는, 애관극장에 갈 땐 늘 '구경 간다'고 했다. 대략 1930년대부터 쓰기 시작한 말인 것 같다. 구경을 간다는 건, 극장에 간다는 뜻이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여러 문화콘텐츠를 접한다는 얘기다.

구경을 한 후엔, 먹으러 갔다. 그 시절의 문화였다. 일제강점기의 인천 사람들은 '표관에서 영화보고, 사정옥(寺町屋)에서 냉면'을 먹었다. 사정옥은 지금의 답동성당 앞(옛 가톨릭회관 자리)에 있던 유명한 냉면집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엔 어땠을까? '애관에서 영화보고, 평화각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애관극장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가서 영생당한약방과 대제한의원을 지나고 나면, 바로 거기에 화상(華商)이 운영하던 평화각이 있었다.

배다리쪽에서 가려면 동서대약방(옛 북도약국)을 지나 좀 내려가면 평화각이 나왔다. 평화각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군만두, 더 나아가 탕수육을 먹으면 그야말로 횡재하는 날이었다.

해방 이후, 애관극장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극단 '국극사'의 창극 <흥보전>을 공연한 애관에는, 오태석, 정남희, 박록주,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국악인이 총출동했다(1946년 7월 23일 <대중일보>). 그 시절 내 외할머니처럼 싸리재 토박이라면, '애관~ 평화각'으로 이어지는 행복을 누린 추억이 있으리라.

1946년, 애관극장에선 무용가 장추화가 공연을 했다. 최승희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남방무용(인도무용) '타블라의 리듬'으로 공연했다. 인천 사람들은 두 남성의 현란한 춤을 통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일찍이 가까운 거리의 극장(애관)에서 두 남성의 원초적인 춤을 본 일이 없었기에 그렇다. 그 춤을 춘 송범(1926년~2007년)과 김진걸(1926년~2008년)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애관을 실제 말해 줄 분이 없어서 안타깝다.
      
애관극장과 관련해선, 사진 두 장을 종종 활용한다. 이 두 사진에 대해선 좀 더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인천과 관련한 책과 기사에서 때론 오류가 발견되기에 그렇다. 두 사진 모두 시대는 1950년대고, '여성국극'과 관련 있다.

1950년대는 여성국극의 시대였다. 여성들이 중심이 된 창극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화려한 의상으로 주목을 받았고, 당시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했다. 인천에서도 여성국극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중심이 된 극장이 애관이다.

<메이드 인 인천>이란 책에 애관극장 사진이 있다. 1940년대 후반이 아니다. <광야(廣野)의 역습(逆襲)>이란 영화 간판이 걸렸다. 서울 중앙극장에서 1954년 5월 2일 개봉했다. 서울과 인천은 같이 개봉하기도 했고, 한 주나 때론 두 주의 시차를 두고 개봉했다. 서울보다 인천이 좀 늦는다고 해도, 1954년이 틀림없다.
 
여성국극의 간판. 조금앵은 1954년부터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유정낭군(有情郎君)>은 1954년 공연작품이다.
 여성국극의 간판. 조금앵은 1954년부터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유정낭군(有情郎君)>은 1954년 공연작품이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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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게, 함께 걸린 여성국극 간판이다. '조금앵과 그 모임'이라는 여성국악단 공연이다. 여기에 신라(新羅)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조금앵은 1954년부터 '신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유정낭군(有情郎君)>은 1954년 공연작품이다. 1954년 8월에 '신라여성국극단'이 <새실랑(새신랑)>(박노홍 작)을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을 한다. 이 단체에서의 주역은 조금앵, 조애랑, 김인수(김진진)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같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유정낭군>이란 여성국극 간판이 걸린 사진의 촬영 시기는, 1954년 초여름 쯤으로 짐작된다.

애관극장 가득 채운 '고무신 부대'

1950년대 중반부터, 애관극장은 여성국극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고무신 부대'란 말이 있었다. 여성국극의 관객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이 모두 고무신을 신고 왔기 때문이다.

고무신 부대와 더불어 '가마니에 갈고리'란 은어가 있었단다. 여기서의 '갈고리'는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갈고리로 자루 등에 무언가를 담을 때 쓰는 연장이다. 그 당시 여성국극의 인기로 돈을 가마니로 담았다는 전설적인 얘기가 있는데, 그 돈을 담기 위해선 갈고리(갈쿠리)가 있었어야 했을 거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게 크루피어(croupier)와 통한다. 도박장에서 룰렛을 진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 또한 갈퀴 같은 것으로 지폐를 긁어모으는 행동을 한다. 여성국극과 관련해 1950~1960년대에 전해지는 용어 중에서, 돈을 쓸어담는 사람과 행위를 '갈고리(갈쿠리)'라고 했던 건 생각해 볼수록 꽤 재밌다.
   
애관극장 간판 작품인 여성국극 <두견새 우는 시절>은 1956년 1월 8일 현재 서울의 명동예술극장인 시공관에서 초연했다.(출처 : 1956년 1월 5일자 <조선일보>)
 애관극장 간판 작품인 여성국극 <두견새 우는 시절>은 1956년 1월 8일 현재 서울의 명동예술극장인 시공관에서 초연했다.(출처 : 1956년 1월 5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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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사진대관>(1957년 1월 1일 발간)에도 애관 사진이 있다. 1956년 사진으로, 해상도는 좋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삼성(三星)'이라는 로고가 보인다. 여성국극단 삼성이 여기서 공연을 했는데, 박보아-박옥진-조양금을 가리킨다. 여성국극단 '삼성'의 세 사람은 조금씩 바뀌는데, 복옥진-박옥란-조양금을 삼성이라고도 했다.

애관극장 간판 작품은 여성국극 <두견새 우는 시절>(4막 5장)로 고려성이 만들고 이유진이 연출했으며 1956년 1월 8일,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했다. 서울에서 초연을 하고, 인천에서 공연을 한뒤 이런 사진이 남게 된 거다. 여기서의 삼성(세 자매별)은 박보아-박옥진-조양금이고, 안무는 '매방'으로 표기됐는데, 훗날 승무와 살풀이로 인기를 날린 이매방(1927년~2015년)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이매방의 레퍼토리는 '장검무'와 같이 중국의 경극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가 본명을 버리고 '이매방'이라고 한 것은, 중국의 매란방과 연관이 있다. 남성이지만 여장(女裝)으로 인기를 끌었던 매란방처럼, 이매방은 그렇게 공연(무용)을 했고, 인천에선 시민관이나 애관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여성국극단 '삼성'은 김향(대본, 연출)이 중심이었다. 삼성국극단은 여성국극의 성공에 힘입어, 삼성영화사를 만들고 국극영화에 도전한다. 그렇게 해서 <대춘향전>(1957년)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는 여성국극의 스타 박옥진, 박옥란, 조양금, 조양녀와 함께, 박노식, 정민 등 유명 남자 배우가 출연했다. 여성국극의 큰 인기와는 다르게, '한국 초유의 국악영화'라는 이름을 내건 <대춘향전>은 크게 재미를 못봤다. 애관극장과 같은 전국의 여러 극장에서 간판을 올렸지만, 이내 곧 간판을 내리게 됐다.
 
여성국극에 <두견새 우는 시절>이 있다면 1967년에는 <두견새 우는 사연>이 애관극장에서 상영됐다.
 여성국극에 <두견새 우는 시절>이 있다면 1967년에는 <두견새 우는 사연>이 애관극장에서 상영됐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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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에 <두견새 우는 시절>(1956년)이 있다면, <두견새 우는 사연>(1967년, 이규웅 감독)이란 영화가 있다. 둘 다 모두 판소리와 연관이 된다. <두견새 우는 사연>은, 애관극장에서 상영해서 크게 히트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춘향전'을 비튼 영화다. 임희재 극본으로 이도령과 같은 역할로 윤도령(신성일), 춘향과 비교되는 옥화(김지미), 월매에 대항하는 계선(황정순)이 등장한다. 춘향전은 해피엔딩이지만, '두견새 우는 사연'은 이런 내용이다.

"윤승지의 외아들 윤도령(신성일)은 퇴기 계선의 딸 옥화(김지미)를 사랑하나 윤승지는 감히 퇴기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윤도령을 안진사댁 외동딸과 혼인하게 한다. 그러자 옥화는 윤도령을 그리워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죽는다. 그 후 옥화의 망령이 나타나서 자신을 배반하고 안진사댁 딸과 결혼한 윤도령을 회개하게 한다."

공포 요소가 있는 영화로, 1967년 늦여름 애관극장에서 상영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는 김소희의 판소리가 들어가고, 실제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이 상여의 앞 소리꾼으로 등장해 출연한다.
 
영화 <두견새 우는 사연>의 한 장면
 영화 <두견새 우는 사연>의 한 장면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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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견새 우는 사연>의 한 장면
 영화 <두견새 우는 사연>의 한 장면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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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최초의 극장(협률사)에 뿌리를 둔 애관극장의 역사는 120년이 넘고, 애관극장이 지금과 같은 외관을 갖게 된 것도 60년이 지났다.

인천 예술사의 산증인 

1960년 9월, 애관극장이 새롭게 단장을 했고, 중앙 일간지에까지 광고를 냈다. "수(遂) 신장개관(新粧 開館)", "사운드 스크린 완비! 현대시설의 대 휴게실! 새로운 시설, 명화의 전당 근일(近日)개관" 이런 홍보 문구와 함께, 타 지역 사람들이 관심을 끌 만한 문구에서 시선이 머문다. "팔미도, 월미도, 작약도를 조망할 수 있는 옥상 전망대"

애관극장은 분명 영화관이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통예술과도 아주 밀접한 공간이다. 용동권번, 한남권번의 공연이 여기서 이뤄졌고, 일제강점기 명창명인명무가 애관극장에서 공연했던 걸 모두 자부심으로 기억하는 공간이다.

여성국극의 인기가 중천이었을 때를 기억하고 또 기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천 역사의 산 증인 '애관'은 인천문화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여창가곡이라는 '정가'가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얘기를 다룬 영화 <해어화>(2015년)가 개봉했을 때, 꼭 애관극장에서 보고 싶었다. 영화의 무대는 경성이라지만, 이 영화에 관련된 여러 내용이 내게는 그 시절 애관 옆의 용동권번 기생의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965년 상영한 인천 출신 여배우 태현실이 주연 영화 <막내딸>(출처 : 1965년 3월 16일자 <경향신문>)
 1965년 상영한 인천 출신 여배우 태현실이 주연 영화 <막내딸>(출처 : 1965년 3월 16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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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관극장 역사의 일부를 이렇게 파노라마처럼 정리하고 나니, 1960년대 싸리재에서 살았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욕탕집 딸이 나온대요. 애관으로 구경갑시다."

한때 인천에서 살았던 여배우 태현실, 그녀의 어머니는 '은하탕'이란 목욕탕을 경영했다. 태현실이 주연한 주연한 <막내딸>(1965년)도 애관극장에 걸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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