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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냉장고에는 A4 종이 두 장이 붙어 있다. 두 장 모두에는 똑같이 가로 10칸, 세로 30줄 정도 되는 표가 꽉 차게 들어가 있다. 가로에는 해야 할 일이 칸마다 하나씩 적혀 있고, 세로에는 날짜가 적혀 있다. 이것은 일일 체크리스트다. 하나는 아이 것, 나머지 하나는 내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하는 아이의 모습
 해야 할 일을 하고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하는 아이의 모습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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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아이는 코로나로 학교에 거의 가지 못했다. 온라인 학습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로 익히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게을러졌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아무리 1학년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를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다

2년 전 네이버 오디오 클립 '작가의 본심' 강연에서 들은 장강명 작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작가는 전업 작가가 된 이후부터 기상 시간, 글 쓴 양, 작업 시간, 운동 여부 등을 매일 엑셀 파일에 기록하여 자기 관리를 한다고 했다. 영향력 있는 좋은 책을 꾸준히 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코로나 시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빈둥대는 초1에게 이것이 필요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세분화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냉장고 위에 붙여 놓았다. 하루 일과를 기록하며 관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해야 할 일들은 나의 교육관과 아이 의견을 반영하여 정하였다.
 
아이가 할 일 : 동시 필사하고 한 줄 생각 쓰기, 짧은 글쓰기, 책 읽기(20분, 30분), 짧은 독서록 쓰기, 동화책 2쪽 필사하기, 글 쓴 것 발표하기, 수학 2장 풀기, 영어독서프로그램 하기, 운동하기, 음악 듣기, 오늘의 질문 쓰기
 
내가 할 일 : 시 필사하기, 짧은 일기 쓰기, 책 읽고 마음에 남는 문장 쓰기, 영어 명문장 따라 쓰기, 3km 이상 걷기, 음악 듣기, 아이 독서록에 댓글 달아주기, 아이 책 읽어주기, 자기 전에 핸드폰 하지 않기

 
처음에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어 이것들을 모두 매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하루가 정말 빠듯했다. 그동안 놀고 싶으면 본인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놀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아이는 바뀐 생활 패턴을 버거워하기도 했다.

'이럴 거면 나는 2학년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도 했다. 나는 아이를 달래가며, 응원해가며, 아이의 꿈을 상기시켜 가며 동기부여를 했다. 그리고 아이 옆에서 엄마도 똑같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는 어떤 설득과 회유의 말보다 엄마의 행동을 보고 수긍하는 듯했다.

아이만 시켰다면 나는 아이를 들들 볶았을 것이다. 아이를 쫓아다니며 했는지 안 했는지, 언제 할 건지, 왜 아직 안 했는지 계속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같이해보니 규칙적으로 일정한 과제를 매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시키기만 할 때랑 나도 같이 할 때는 확연히 달랐다. 잔소리를 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 세웠던 계획을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자는 계획을 주말에는 쉬는 것으로 바꾸었다. 할 일 중 그날 하기 싫은 것 1~2개를 골라 안 할 수 있는 면제 쿠폰을 만들어 썼다. 못한 것들은 주말에 보충할 수 있다는 규칙도 추가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이렇게 저렇게 조율하며 해나갔다.

지금도 냉장고에 붙여져 있는 체크리스트를 보면 아이 것도 내 것도 빈칸이 뻥뻥 뚫려 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아이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잔소리를 하려면 일단 내 체크리스트에 동그라미가 채워져 있어야 했다. 나도 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해야 했다.

다음 달 체크리스트에 추가한 것
 
체크리스트를 첫 달 해봤더니 하나씩 동그라미를 채워나갈 때마다 작은 즐거움과 뿌듯함이 있었다.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면서 느슨했던 우리의 하루는 꽤 촘촘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허전하고 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달 체크리스트부터 '아이에게 감사, 칭찬의 말 해주기' 항목을 넣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를 칭찬하거나 아이 존재에 대해 사랑과 감사의 표현을 했다. 예를 들면 '도현아.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어? 이런 건 6학년 형들도 못 할 것 같은데', '엄마는 도현이가 자랑스러워', '엄마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같은 말들이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잔소리가 많아지는 내가 싫었다. 어떤 날은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이거 했어? 저거 했어?' 확인하고 재촉하다 끝나기도 했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그날 하루가 아깝고 허무했다. 그런 하루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15년 넘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은 긍정적인 말들이었다. 어쩌면 교육은 따뜻한 말이 전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바빠 하루종일 아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 날이라도 하루가 끝나기 전에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면 그 하루가 괜찮아졌다. 아이 또한 엄마의 말 한마디를 받으면 그날의 행복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며 기분 좋게 잠이 들곤 했다.

오늘도 아이와 나는 체크리스트에 동그라미를 채우기 위해 분주하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의 꿈과 목표를 갖고 하루하루 나아간다. 오늘도 정말 수고 많았다고, 네가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태그:#교육, #체크리스트, #긍정적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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