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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명자 잎과 줄기
 결명자 잎과 줄기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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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 차를 마실 수 있지만 오늘은 결명자다. 글을 쓰는 것처럼 집중해야 하는 작업을 할 때 따듯한 차 한 잔은 집중 효과를 배로 만들어준다. 평소  결명자는 여름에 주로 끓여 먹었던 차였다. 결명자차를 큰 주전자에 끓여 놓으면 다른 차들보다 유독 쉽게 상하지 않는다.

이가 시리는 냉장고의 차가운 물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에 여름에도 물처럼 마실 차를 끓여 놓아도 냉장고에 쉬이 들여놓지 않고 상온에 놓는다. 그러다 보니 어제 끓인 차임에도 상해서 못 마시게 돼 아깝게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유독 결명자는 다른 차에 비해 쉽게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어 여름에 주로 끓여먹곤 했다. 아직 겨울임에도 결명자차가 생각나는 건 머지않아 봄과 함께 찾아올 귀여운 설렘 때문이다. 

아는 지인이 남해안 작은 섬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고기도 잡으며 살고 있다. 세상에 달관한 듯이 살고 있는 그에게 놀러간 적이 있다. 딱 이맘때 봄이 오기 전 겨울이었다.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섬 한쪽에서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 길쭉길쭉 꼬투리를 달고 있는 것을 무심하게 낫으로 베어 큰 포대에 담아주고는 알아서 먹으란다. 눈에 좋은 결명자라고.

청정 남해안 섬에서 자라는 것이라 그게 무엇이든 좋아 보여 덥석 받아 안고 집으로 가져왔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됐다. 기다란 콩 꼬투리이니 그냥 무식하게 하나씩 잡고 까기 시작했다.

온 식구가 달려들어 단순하게 손으로 까다보니 끝은 났고, 한 바구니 정도 나왔다. 깨끗하게 씻어 뭉근한 불에 살살 볶아 차 덖는 것을 흉내내고 나니 그럴듯한 결명자차가 됐다. 그렇게 얻게 된 결명자를 지금까지 잘 마시고 있다. 
 
마치 땅콩 새싹처럼 생긴 결명자 싹.
 마치 땅콩 새싹처럼 생긴 결명자 싹.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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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그 이후로 생겼다. 결명자 꼬투리를 까면서 생긴 마지막 티끌들과 껍질들, 그리고 지저분한 찌꺼기들을 마당 텃밭에 퇴비하라고 버렸는데, 봄이 되자 텃밭에서 작은 싹이 하나 둘 올라왔다. 동글동글한 잎이 달린 너무나 귀여운 싹이었다.

처음엔 동그란 잎이 마치 땅콩 새싹처럼 생겨 몇 년 전 농사 지었던 땅콩이 떨어져 싹이 텄나 싶었다. 그런데 뭔가 좀 달랐다.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봐도 땅콩이 아니었다. 아뿔싸, 찌꺼기에 묻혀 버려졌던 결명자 작은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결명자를 차로만 마셔봤지 자라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기왕 이렇게 된 것 잘 키워서 결명자차를 더 만들기로 욕심을 냈다.

그런데 자라는 모습이 상상 이상이었다. 여름이 되자 노란 꽃도 피었고, 노란 꽃에선 기다란 씨방이 자라 꼬투리가 됐다. 결명자의 꼬투리는 아주 날씬하고 길게 생겼다. 쫙 뻗은 손 한뼘 정도 길이였다. 그러는 사이 키가 커 집 식구들보다 크게 자랐다. 작은 텃밭에서 키우기엔 너무 큰 결명자였다.

그래도 자라는 생명을 어쩔 수 없어 다 받아주며 간신히 키워 가을엔 제법 많은 결명자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다시 봄이 되자 걱정이 됐다. 또 싹이 나오면 어쩌지? 예상대로 결명자 싹은 텃밭과 마당 곳곳에서 고갤 내밀었다. 이번엔 전략을 바꾸었다. 
 
작은 콩처럼 생긴 결명자
 작은 콩처럼 생긴 결명자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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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에게 결명자 싹을 나눠줬다. 그냥 심어놓고 가을에 수확만 하면 되니 농사라 할 것도 없이 편한 점을 내세웠다. 단, 엄청 클 수 있으니 텃밭이 좀 커야 함을 경고했다. 그렇게 싹을 나눠주고 열 개 정도 싹만 남겨놓았다.

햇빛이 적게 드는 땅으로 옮겨 심었더니 이번엔 첫 해만큼 튼실하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다 수확 시기를 놓쳤고, 결명자는 바짝 말라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저 꼬투리가 터져 씨앗들이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됐다.

날이 갑자기 풀린 며칠 전 벼르고 별러 꼬투리를 땄다. 그리곤 또 결명자 씨앗을 마주하고 있다. 햇빛이 적어 부실했던 열매는 씨앗도 작았다. 그래도 감사하며 차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 올 봄에도 적당히 싹이 터준다면 이번에는 햇빛 좋은 곳으로 안내하리라. 

언젠가 콩을 수확하며 느낀 점을 SNS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봄에 열 개로 심은 콩이 가을이 되니 이렇게 많아져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이 나중에 큰 일로 커질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매사에 온 마음을 다해 살아야겠다." 그때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을 겪었다. 작은 단서가 있을 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작은 일이 큰 일로 몰아쳐 왔다.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며 후회한 일을 콩을 보며 떠올렸다. 

하나의 씨앗이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그것이 좋은 일이었을 때는 운수대통이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작은 일이 나중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불행으로 커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엔 생각보다 그런 일이 많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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