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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은 무너진 교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대한민국 교권보호국이 신설되었을 것을 가정하여, 보호국 소속 인물 나화진이 체벌로 학생들을 훈육하는 내용의 웹툰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20년 11월부터 연재되어 현재까지도 네이버 웹툰 인기 최상위를 달리고 있다. 만화를 본 네티즌들은 학교폭력 가해자 학생을 체벌하는 삽화를 보며 통쾌하다거나, 요즘 학생들에게 인권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의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 웹툰은 명료한 서사구조와 잔혹한 폭력성 덕분에 인기를 끌었다.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식에 입각해,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을 악의 축으로 삼고, 무소불위 교권을 지닌 교사가 합법적인 '참교육'을 시전하는 것. 사람들은 작품이 규정한 '악'을 척결하는 것으로부터 신선한 쾌감을 느낀다. 나화진이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타격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극단적인 묘사와 표현, 지극히 단순화된 서사는 작품이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나이주의를 부활시켜 청소년들을 전통적 권위에 복속하려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많은 논쟁거리가 있으나, 이번 칼럼에서는 '규제'의 측면에서 웹툰이 청소년 집단의 인격권을 침해할 여지가 없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웹툰 창작에 있어서 '집단'의 인격권과 표현의 자유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웹툰 자율규제의 균열과 청소년 혐오 표현의 대두

웹툰은 방송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받는 방송 프로그램과 달리 법적 제재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웹툰이 웹툰자율규제위원회의 자율규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보호법 제11조 제1항도 웹툰 플랫폼이 자율적으로 청소년 유해여부 등을 결정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자율규제는 그 특성상 웹툰 창작물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어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법적규제와 달리 자율 규범 및 자발적 준수를 담보로 이루어져 강한 구속력이 없고 웹툰 사업 부문 이해집단에 의하여 규정된 약관에 근거한 규제이기에 민주적 정당성도 낮다.

처음부터 웹툰 내용 등에 대한 규제가 자율규제에 의해 이루어진 건 아니다.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만화가협회가 공동 체결한 '자율규제 협력에 대한 업무협약'에 의해 웹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법적규제로부터 벗어났다. 법적규제를 유지하면 성장하는 웹툰 시장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한다고 논란이 일 것이니 규제권한을 협회에 전임한 것이다. 이에 웹툰자율규제위원회는 위임된 권한으로 웹툰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면 플랫폼 서비스 종료, 청소년 접근 제한, 성인 인증 권고, 연령 등급 조정, 내용 수정 등 다섯 종류의 권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웹툰 자율규제에도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급변과 콘텐츠의 무차별적인 생산으로 자율규제가 힘을 잃고 혐오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최근에는 웹툰 작가 기안 84가 자신의 웹툰 '복학왕'에 여성혐오 의혹을 받는 삽화를 그려 넣어 논란이 되었다. 웹툰자율규제위원회는 논란이 된 작품에 대하여 철저한 조사나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 일각에서는 공공연히 대중에게 노출되는 웹툰이 여성 집단의 인격권이 침해하였다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논란이 누적되면서 웹툰 작품들의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해주어야 할지, 작품 내 혐오와 차별 문제를 그저 눈감아줘야 할지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웹툰 내 혐오표현은 비단 여성혐오에 그치지 않는다. 웹툰 주 수요층인 10대, 20대의 젊은이들의 취향을 겨냥하다 보니 청소년 혐오 표현 문제도 심각하다. '참교육'의 예가 대표적이다. 작품은 청소년들을 교권 침해의 원흉이자 체벌이 정당화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초중등교육법상 체벌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학교폭력과 교권침해가 근절되지 않는 것이라는 편향된 인식을 심어준다. 더욱 큰 문제는 삽화의 폭력성을 도구로 청소년에 대한 체벌을 가학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청소년의 존엄은 챙기지 않은 채, 집단을 싸잡아 모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교육'은 창작물이라는 미명 하에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며 논란을 일축한다. 웹툰자율규제위원회도 참교육의 혐오 표현을 제대로 필터링하지 못한다. 겹겹이 보호되는 청소년 혐오 표현 때문에 청소년 집단의 인격권은 처참히 짓밟히고 있다.

물론 자율규제가 실패하였다고 해서 법적규제로 회기해야 한다는 식의 발상도 위험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기준의 경우 청소년 당사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비청소년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게 대다수이다. 유해성이나 선정성도 신체 노출 여부 등에 기반해 기계적으로 판단한다. 주장의 요지는 현행 규제 체계에 분명한 한계점이 있다는 것이고, 규제의 결함으로 인해 청소년의 인격권이 일방적으로 침해된다는 점이다. 법적 규제도, 자율 규제도 청소년 혐오 표현을 막고,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서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규제가 정답이 아니라면?

규제가 능사는 아니다. 설령 규제를 강화한다고 하여도 법률상으로 집단의 인격권을 보호하기는 어렵다. 집단의 인격권은 권리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고, 침해된 법익과 권리의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규제의 강제성을 높이는 것보다 규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점을 진단하고 혐오표현이 특정 집단의 인격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문화의 소비 및 생산의 영역에서는 '도덕성'이나 '윤리'와 같은 숭고한 가치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문화야말로 포괄적 교설들이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는 열린 장이다. 물론 '혐오'와 '농담'의 경계를 무 자르듯 가르기 힘든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숙의가 필요하고 피해 당사자들의 의사와 인격권이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도 공론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인격권과 윤리적 가치들을 논할 수 있어야한다. 이에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집단의 인격권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둘의 조화점을 모색하기 위한 끊임없는 대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공론장의 결함부터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규제와 관련한 모든 권한들은 비청소년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자율규제, 법적규제 그 규제들의 주체는 언제나 비청소년들이었다. 비청소년들은 배타적 권한을 행사하여 청소년들을 규제와 보호의 틀에만 가두었다. 혐오표현에 대해 공적 영역에서 자유로이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이주의와 위계에 입각해 청소년들의 의견을 일축해버렸다. 어쩌면 그러기에 청소년 집단을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에 있어 인격권의 주체인 청소년들은 타자에 의해 권리 주체성이 결정되는 객체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존 공론장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선 논의 주체의 다각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청소년, 여성, 성소수자와 같은 혐오표현 대상 집단이 자율규제위원회 내의 규제 주체로 참여해 모니터링할 수 있다. 혐오표현이 담긴 콘텐츠의 생산이나 유포를 무조건적으로 금지하기보다 콘텐츠로 인해 혐오의 피해를 당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충분한 공론화를 거쳐 콘텐츠의 표현이 명백한 혐오이며 비판의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이 내려지면, 참교육 같이 노골적으로 특정 집단을 모욕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표현의 강도를 낮추라는 경고를 해야 하며, 경고의 수회 누적 시 웹툰 연재를 중지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 만약 혐오 표현이라고 합의되지 않았다면, 콘텐츠 별지에 소수의견을 게재하여 독자들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청소년 혐오표현 창작물 관련 문제를 해결함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하는 원칙은 일방적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이나 나이, 성별 등에 의해 혐오표현이 정당화되는 구조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혐오 표현도,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도 대화와 타협 그리고 공론화로 해결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것이 갈등과 차별 없는 평등한 민주적 해결방법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인격권 보장을 위한 웹툰 소비자의 책무

약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자극적인 창작물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데에는 개인 윤리적 차원에서 웹툰 소비자의 탓도 크다. 사회 문제의 본질은 간과하면서 청소년을 사회문제의 원흉으로 내모는 웹툰의 수요를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웹툰 제작자들은 이러한 저작물들의 수요가 없다면, 더 이상 작품에 청소년 혐오표현을 넣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혐오와 차별로 뒤덮인 작품을 감상하며 약자의 아픔을 소비하는 우리가 웹툰 제작자들로 하여금 혐오표현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물론 소비자의 책무까지 법률 등에 못박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조차 없다. 지금까지의 인격권을 보호하는 법률(민법, 형법상 명예훼손 및 모욕죄 등)은 주로 인격권 침해 행위만을 금지해왔으며, 우리 헌법도 '행위자'가 아닌 공공복리, 질서유지,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최소 한도 내에서 법률로써 위법한 '행위'만을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가치판단이나 양심의 자유까지 제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법이 면죄부를 주니, 혐오 표현 웹툰의 제작자와 그 소비자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혐오표현에 윤리적 문제가 없는지는 비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젠가 청소년이었으며, 청소년이고, 그들의 동료 시민이다.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다. 때문에 청소년 혐오 표현과 그러한 창작물을 소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격권을 스스로 침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인 윤리의 차원에서 이러한 소비문화가 우리 문화산업 전반이 퇴행하도록 만들고, 청소년 혐오 문화를 양산해내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고찰해보길 권한다.

태그:#참교육, #학교폭력, #표현의 자유, #청소년 혐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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