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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학자추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실종된 김성학씨의 동생 김성진(사진 왼쪽)씨와 작은아버지 김준희씨.
 고려대 학자추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실종된 김성학씨의 동생 김성진(사진 왼쪽)씨와 작은아버지 김준희씨.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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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18일이 형을 본 마지막날이었다. 형은 그날 가족들과 함께 신병교육을 마친 동생 김성진(52)씨를 면회하러 왔다.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통닭 10마리와 떡을 해왔다. '고려대 운동권'이었던 형은 동생에게 '불온서적' 10권을 건넸고, 동생은 문제가 안 될 책만 남기고 나머지는 형에게 돌려줬다. "형은 공부나 열심히 하소"라며.

하지만 동생 김성진씨는 그날 이후 형을 볼 수 없었다. 1991년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학자추)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형 김성학(54)씨는 3월 어느날 같이 자취생활을 하던 후배들에게 "학교에 갔다 올게"라는 말만 남기고 30년 동안 실종됐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2일 광주에서 기자와 만난 동생 김성진씨는 "그때 면회하면서 같이 밥을 먹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라고 말했다. 형 김성학씨는 면회갔을 때 '불온서적'을 건네면서 "지금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고, 부르주아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형 김성학씨는 '유서 같은 편지'를 남겼다. 동생 김성진씨는 "유서처럼 쓰긴 했더라"라고, 작은아버지 김준희씨는 "아버지(형님)랑 동생 등 우리 가족들한테 보내는 거였는데, 마치 어딘가 떠날 것 같은 내용이었다"라고 전했다.

김성진씨는 형의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는 특히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을 통해 옛날 안기부에 근무했던 직원한테 알아보니 형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있어서 바다에 수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형은 타협을 안 한다, 외고집이 있다"라며 "그래서 학생운동을 했을 거다"라고 덧붙였다.

동생 김성진씨는 조만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정근식, 2020년 12월 2기 출범)를 통해 형의 '30년 실종사건'을 풀어볼 계획이다.

다음은 2월 22일 2시간여 동안 동생 김성진씨, 작은아버지 김준희씨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아버지가 편지로 '형이 행방불명됐다'고 했다"

- 형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언제 받았나?
동생 "(1991년) 제가 진해에서 군생활 할 때 받았다."

- 누가 연락해줬나?
동생 "아버지한테 들었다. 그때 아버지랑 1주일에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형이 행방불명됐다'는 편지가 아버지한테서 왔다."

- 연락받은 날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나나?
동생 "황당했다. 1990년 11월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아버지랑 누님, 형님 등이 처음으로 면회를 왔다. 통닭 10마리 튀기고 떡을 해서 왔다. 그때 찍은 사진이 있더라. 그렇게 형을 보고 그 뒤로 (지금까지) 얼굴을 못봤다. 그때 형이 면회 오면서 소련 맑스레닌주의 서적 10권을 가져왔다. 한번 읽어보라고 해서 '형은 공부나 열심히 하소' 그랬다. 그때 면회 하면서 같이 밥을 먹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제가 (1991년) 6월에 첫 휴가를 나와서 고대 총학생회에 가서 최홍재 총학생회장도 만났다. 자기들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 실종가족협의회도 찾아갔다."

- 형이 준 책은 어떤 거였나?
동생 "거의 대부분 불온서적이다. 소련에서 만든 맑스레닌주의 책도 있었고, 김일성 항일투쟁에 관한 책도 있었다. 군대에서 머리 안 아픈 책만 놔두고 형한테 돌려줬다."

- 형이 뭐라고 하면서 그런 책을 줬나?
동생 "'세상이 이렇게 가는 것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고 부르주아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흔히 당시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하는 얘기였다. 저는 형한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부모님이 고생하니까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제' 하면서."

- 서울에 올라가서 어떻게 수습했나?
작은아버지 "성학이는 처음에는 개포동 저희 집에 있었다. 그때 우리 애들이 아직 어려서 애들 공부도 가르쳐 주고. 입학금이나 학비를 내가 댔다. 그렇게 저희 집에 있었는데, 어느날 공부한다고 학교 옆으로 이사하겠다고 했다. 개포동에서 안암동까지 가려면 멀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갑다 했다. 거기서 방을 얻어 자취한다고 했다. 그러다 실종됐다고 해서 자취방을 찾아갔다."

- 직접 자취방에 가보니까 어땠나?
작은아버지 "먼저 학생회관을 갔다. 학생회관에 '미 제국주의 어쩌구' 하는 빨간 글씨(현수막)가 써 있더라. 억장이 무너졌다. '오매 이 놈 새끼가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나?' 그리고 나서 자취방에 가니까 세 명이 있더라. 성학이가 어디에 간지도 모르고. 아침에 사라졌으니까. 한겨레 지국에 다녔던 것 같더라."

동생 "<한겨레>가 1988년엔가 창간했을 텐데 그 즈음에 형이 양천 신정지국 총무를 맡았다. 양천구에 아파트가 개발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배달도 하는 등 두 달을 도와줬다. 또 형이 <한겨레> 창간 주주로 20주를 샀다. '이런 신문의 주식은 무조건 사야 한다'고 했다. 그 주식은 이제 제 앞으로 돌려놨다."
 
형 김성학(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사람)씨는 1991년 11월 18일 동생 김성진씨를 면회하러 갔다.
 형 김성학(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안경 낀 사람)씨는 1991년 11월 18일 동생 김성진씨를 면회하러 갔다.
ⓒ 김성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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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딘가로 떠날 것 같은 내용이었다" 

- 자취방에서 편지 같은 게 발견됐다고 들었다.
작은아버지 "같이 자취하던 애들한테 확인한 거다. 그 내용이 부모님과 작은아버지한테 볼 면목이 없고, 그동안 신세진 급우들한테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어딘가 떠날 것 같은 내용이었다."

- 편지 형식이었나?
동생 "네. 쪽지였다."

- 몇 장 짜리였나?
동생 "한 장 짜리였다.

- 어떤 종이에다 썼나?
작은아버지 "줄이 그어진 노트였다."

- 그 편지를 가지고 있나?
작은아버지 "서울에서 가지고 있었는데 김포로 이사하면서 어디에 둔지 모르겠다. 다시 찾아봐야 한다."
동생 "저한테 복사본이 있었는데..."

- 그 편지 내용을 기억하나?
작은아버지 "아버지(형님)랑 동생 등 우리 가족들한테 보내는 거였다. 공부를 잘해서 지그 어머니 아버지가 많이 기대했고, 저도 항상 '어머니 아버지 고생 안 하게 하겠다'고 했다."
동생 "그 메모 내용 마지막 부분이 '성진아 미안하고 네가 잘 해라'는 거였다. 유서 비슷한 내용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필체는 맞을 거라고 보는데 저는 느낌이 이상했다. (실종되기 전) 저한테 편지를 서너 번인가 썼는데 '혼란스러운 세상을 얼렁 정리해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앞이 캄캄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면 저는 답장에다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회사 가서 잘 살아야제'라고 썼다. '어머니 아버지 고생하시니까 한달에 한번은 부모님을 찾아보라'고도 했다. 그렇게 편지를 썼는데 4~5개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 유서라고 생각했나?
동생 "그 내용을 보면 유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서처럼 쓰긴 썼는데 아이러니하다. 저녁에 학교에 갔고, (자취방과 학교는) 15분 거리라고 하는데 최홍재 총학생회장은 형이 (학생회관에) 안 왔다고 하더라. 그러면 10~15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을 통해 옛날 안기부에 근무했던 직원한테 알아보니 형이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있어서 바다에 수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 그런 얘기를 들은 게 몇 년 전인가?
동생 "5년 전인가 그렇다. 전직 안기부 직원이 당시에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 전직 안기부 직원에게 직접 들었나?
동생 "한 다리 거쳐서 들었다. 형을 수장했다고. 안기부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형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직원이 바위를 달아서 수장했다고 답했다고 했다.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에 근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양심선언하면 끝날 일인데..."

- 그 직원을 직접 만날 생각은 안 했나?
동생 "그렇게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상황이니 만날 수 없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밝혀져야 할 내용이다."

- 그 안기부 직원의 말을 전해준 분을 제가 만날 수 없나?
동생 "그 직원이 양심선언을 해주면 좋지. (안기부 직원의 말을 전해준) 그분을 통해서 그 직원이 혹시 (국정원을) 퇴직했으면 부탁해보려고 한다."

- 그 직원에게 사실확인서라도 부탁할 수 없나?
동생 "그분이 해줄지 모르겠다"
 
1991년 고려대의 최대 현안은 등록금 인상이었다. 사진은 <고대신문> 1991년 2월 25일자.
 1991년 고려대의 최대 현안은 등록금 인상이었다. 사진은 <고대신문> 1991년 2월 25일자.
ⓒ 고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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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까지는 형이 북한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

- 실종 신고는 언제, 어디에다 했나?
작은아버지 "성북서에 했다. 다다음날 바로 했다. 그 이후로 한강에 시신이 뜨면 그게 성학인지 확인하러 한달 정도 다녔다."

- 실종 신고 이후 경찰서로부터 연락받은 것은 있나?
작은아버지 "그 뒤로 한번도 연락을 못받았다."

- 경찰이 찾았으면 찾았다, 못찾았으면 못찾았다고 가족들에게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작은아버지 "연락이 전혀 없더라. 그때 담당 형사가 해남 사람이었다. 그분이 '성학이가 영암 (출신)인지 알았으면 좀더 신경을 썼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표현하더라."

- 언제까지 형의 행방을 찾았나?
동생 "저는 군대 나와서 한번 찾아보고 그 뒤로는 사느라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썼다. 일만 하다 보니 신경을 못썼다. 가난이 너무 싫었다. 쌀밥을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가난하게 살지 말자는 마음이 절실했다. 그래서 군대 제대하고 청바지 노점상을 시작했다. 29년 동안 일에 미쳤다. 용봉동에 과일가게 내고 결혼한 날 하루 문닫고 계속 일했다. 지금은 사업이 안정되고 여유가 많이 생겼다. 그러다가 과거사진상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다시 (활동)한다니까 이번에는 꼭 진상규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형의 실종과 관련해 당시 고대 총학생회 등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었나?
동생 "전혀 없었다. 당시 운동을 하다가 절에 들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줄만 알고 있더라. 유아무야 30년이 흘렀다. '맘에 진 빚'이라고 얘기하더라."

- 왜 당시 형의 실종사건이 전혀 이슈화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동생 "당시 (노태우 정권과 운동권이) 대립하고 있었고, 너무 힘드니까 쉬러 들어갔다고 생각한 것 같다."

- 지난 30년 동안 형으로부터 어떤 소식도 없었나?
동생 "없었다."

- 어딘가에 형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동생 "5년 전 그 말('수장했다'는 전언)을 듣고 죽어었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북한에 있다고 생각했다. 형이 북한이 있을 줄 알고 북한을 자주 왕래하는 목사님을 후원하기도 했다." 

- 왜 북한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동생 "불온서적을 갖다 주며서 '북한은 거지도 없고 어쩌구 저쩌구' 해서 북한에 있겠구나 생각했다. 무단 월북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5년 전에 그 얘기 듣고 그거는 접었다."

- 결국 타살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생각하나?
동생 "저는 그쪽으로 100프로다."

- 형이 타살될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동생 "형이 곧다. 협상을 안 한다. 타협을 안 한다. 외고집이 있다. 그래서 학생운동을 했을 거다.".
작은아버지 "그때 당시 대학생 하나 없애는 것은... 파리목숨이지."

-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할 것인가?
동생 "당연히 넣을 거다. 지금 서류는 다 준비됐다."

"형은 모범생이었고, 학구파였다"

- 형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떤 사람이었나?
동생 "형이 고등학교(광주 인성고) 때 같이 자취한 적이 있다. 형은 도시락을 세 개 싸서 다녔다. 아침에 밥 먹고, 저녁에 학교가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가서 새참을 먹고 새벽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아침 6시에 집에 와서 다시 학교 가는 모범생이었고, 학구파였다."

- 형이 공부를 잘해서 집안에서 많이 기대했던 걸로 아는데.
동생 "형이 큰 인물이 될 줄 알았다. 당연히 스카이(SKY, 서울대-고대-연세대)를 갔으니 나중에 교수라도 해서 집안의 기둥이 되겠지 다 기대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됐으니 부모 마음이 어떻겠나?"

- 원래 서울대에 진학하려다 실패하고 고대 수학과로 입학했다고 들었다.
동생 "맞다."

- 대학교 1학년 때 형이 다쳤다고 하던데.
동생 "엠티(MT) 가서 다리 인대가 틀어졌다. 6개월 동안 기브스하고 병원 생활을 했다. 그거 때문에 군대도 못갔다. 아예 군대를 가버렸으면 그 일(실종)이 없었겠지."

- 대학에서 형이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나?
동생 "그(실종된) 뒤에서야 알았다. 물론 제가 군대 가기 전에 만날 때에도 그런 얘기를 하긴 했다. <한겨레> 지국 총무할 때도 운을 띄웠다. 저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 형이 NL(민족해방)그룹에서 운동을 했다는 것도 알았나?
동생 "저한테 주는 책을 보고 알았다. 본인 스스로 NL이라고도 얘기한 것 같다. 책도 그런 책만 사다주고."

- 형은 동생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동생 "친구 같은 존재였다. 또 집안의 가장이니 잘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도 형한테 용돈을 주고 그랬다. 집안의 기둥이니까."


[관련기사]
[첫 보도] 30년 실종 '고대생 김성학'을 찾습니다 http://omn.kr/1samj
[증언②]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http://omn.kr/1sbgx

태그:#김성학, #실종 30년 고대생, #김성진, #김준희, #고대 학자추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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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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