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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에 정의는 없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그저 육지에서 내려온 육지 사람들과 제주도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칼을 휘두르는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1947년 3.1만세운동 당시 관덕정의 발포로 시민이 사망하자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도청 공무원, 경찰 등도 함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파업에 참여했다. 육지의 군경과 극우집단인 서북청년단이 진압에 나서면서 제주도는 살육의 장으로 바뀌었다.

진압군인과 경찰은 그들이 진압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육지인들에게 협조하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 신망받고 제주를 위해 애썼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칼춤 앞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산사람에게 죽고 경찰에게 죽고 
  
부친이 설립한 삼양초등학교를 찾은 김평강씨. 그의 부친은 이곳이 불길에 휩싸이자 불을 끄려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부친이 설립한 삼양초등학교를 찾은 김평강씨. 그의 부친은 이곳이 불길에 휩싸이자 불을 끄려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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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강씨의 집은 조부와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작은 회사를 운영해 마을에서는 제법 여유 있는 집안 중 하나였다. 해방 후에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 삼양에 초등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소중히 세운 학교가 4.3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방화로 불탔다. 그 소식을 들은 김평강 부친은 한밤중에 학교에 불을 끄러 갔다가 그곳에서 산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살해됐다. 반면 김평강씨의 사촌들은 군경의 손에 끌려가 삼양 바닷가에서 학살당했다. 

김평강의 구술 = "여기 공덕비에 보면 할아버지 하고 아버지 하고 학교를 세웠다고 적혀 있어. 마을에 뭐라도 해야 한다고 학교를 지은 거지. 그런데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학교에 불을 지르니까 불을 끄러 학교에 갔는데 산에서 온 사람들이 학교에 숨어있었는가 봐. 학교로 올라가다 저기서 만났어. 그날 죽은 청년들이 많아. 우리 동네 사람이 열여섯. 그 밖에도 99명인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굴도 못 봤어. 연락이 와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았지. 아버지 나이가 서른, 어머니 나이가 스물일곱. 산사람들한테 아버지 죽고 난 뒤에 경찰이 왔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서는 마을 청년들을 죽였어. 그때 또 죽은 사람이 많아. 한집안 사람들인데 일부는 산에서 온 사람들한테, 일부는 경찰에게 희생당했지."


'하루에 사람 하나를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삼양지서 주임 정용철)던 서북청년단원과 군경의 잔악함은 극에 달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다시 일본도로 난도질하던 잔악함까지 마을 주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화북의 4.3은 어느 지역보다도 잔인했다. 하루 한 날 가족을 모두 잃고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만이 생존했던 김인근씨는 아직도 끔찍했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김인근의 구술 = "서남쪽으로 조금 가면 소로길이 있고 그 동산에 올라가면 논밭이 쫙 있는데 논밭에 물 대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남자 어른들은 다 총살시켜서 그 물에 다 빠뜨렸습니다. 아버지는 건져 거적에 덮었다가 옮기고, 또 어머니네(여성들)는 제주교육대학에서 서북쪽으로 가는 쪽에 또 길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면 밭도 있고 물도 있는 그 넓은 데가 있는데 어머니네는 거기서... 전부 다 쓰러지니까 그 물에다가...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린 김인근이 며칠이 지나서 아버지 시신을 찾아 나선 저수지에는 죽은 남자들의 시체가 가득했다고 한다. 어린아이 힘으로 도저히 아버지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자 주변 어른들이 도와줘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새언니와 조카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와 박물관이 들어선 그 자리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지만 정확한 자리를 찾기 어려워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고 하다.

"어머니 주변에 조총련이 있어서 그게 문제라"
  
행불자 묘역에서 오빠 김호근 위패를 찾아가는 김인근. 4.3 묘역에는 찾지 못한 행불인을 위한 묘역이 별도로 모셔져 있다.
 행불자 묘역에서 오빠 김호근 위패를 찾아가는 김인근. 4.3 묘역에는 찾지 못한 행불인을 위한 묘역이 별도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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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강의 구술 = "아버지가 폭도들한테 죽었으니까 난 유가족이지. 유가족. 그래서 돈 안 들이고 학교 다녔어. 난 유가족이어서 돈 안 내고 공부를 했지."

아버지가 민보단원(지금의 민간 경찰)이어서 김평강씨 가족은 해방 이후 경찰 유족 대우를 받았다. 유족에게 지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김평강씨 개인의 학비를 면해주는 수준이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김평강씨 어머니에게 가족의 생계는 또 다른 문제였다. 국가 지원으로 아이의 학비 걱정은 없었지만 졸업 후 생계까지 해결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4.3 대량 학살 후 제주 남자들은 국가에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한국전쟁 때 해병대에 자원해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제주는 사람이 귀한 섬이 되었고 이는 곧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졌다. 4.3과 전쟁으로 산업 기반 시설이 초토화된 제주는 곧바로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했다.

한국전쟁 직후 여성 홀로 시어머니와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제주와 같은 섬에서 가장 노릇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김평강씨의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돈을 벌려고 일본으로 밀항을 했다.

모든 것이 가난했던 그 시절 절망의 땅 제주를 탈출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밀항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일제강점기나 4.3 사건 당시 핍박을 피해 건너가 자리 잡아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일본 거주 형제나 친척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구했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 집 건너 밀항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불법 밀항을 시도했다.

1983년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잡혀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 100번째 송환자가 김해공항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때까지 송환된 사람이 모두 2만 1239명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주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은 재일교포 사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조총련과 민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갔다. 

김평강의 구술 = "어머니 주변에 조총련이 있어서 그게 문제라... 조총련이 많아..."

오경대씨 할아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상예리 구장(지금의 반장이나 이장에 해당함)을 지냈고, 손수 예래초등학교를 지었는데도 죽음의 피바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오경대씨의 부친은 제주 4.3의 피바람을 피했지만 한국전쟁 발발 전 예비검속 대상자에 등록되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군경에 끌려가 피해를 보았다.

이승만 정부는 과거 좌익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통제·관리하기 위해 1949년부터 국민보도연맹이라는 것을 조직해 민간인들을 가입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이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며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런 이유로 전쟁 초기 군경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처형했다.

전쟁이 기습적으로 벌어졌으므로 서울 지역에서는 군경에 의한 처형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남부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피해자 수가 점점 증가했다. 특히 후퇴 경로의 마지막 지역이자 고립되어 있던 제주와 같은 곳에서는 피해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처형된 사람들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고 하지만 국민보도연맹원 명단이 남아 있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 없이 즉결 처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실상에 대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 희생자는 5천여 명이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 관련 유족회는 수십 만 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
  
오경대의 부친은 4.3의 불길은 피했으나 끝내 보도연맹의 피해자로 사라졌다.
 오경대의 부친은 4.3의 불길은 피했으나 끝내 보도연맹의 피해자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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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대의 구술 = "저희 아버님이 1950년 6월에 예비검속으로 서귀포경찰서 절간 공장(주정 공장)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6월 15일 갑자기 없어져서 행방불명됐습니다. 그 후 2015년에 무죄 판정으로 보상까지 받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1936년도인가 상예리 구장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동민들이 먹는 대왕수라는 우물을 콘크리트로 해서 만들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1948년도에 기성회장을 하면서 예래초등학교 교사 다섯 교실을 지어서 좋은 업적을 고향에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4.3 지나서 6.25 전쟁이 나니까 예비검속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때 출장소라고 지금의 파출소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버지하고 잠을 같이 자고 있었는데 출장소에서 순경이 와 가지고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 가자고 해서 그 길로 가셨는데 결국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서귀포 경찰서 절간 공장인가 있다고 거기 어머니가 면회를 몇 번이나 갔었는데 그 후에 가보니까 없더랍니다.

아버지는 좌익 활동 근처도 간 적이 없는 분인데 좌익 활동을 했다는 소리를 동네 사람들에게 듣는데 얼마나 억울합니까. 억울하게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말하기를 동네 사람들 중에 좀 똑똑하고 나은 사람을 질투한 사람들이 4.3 때나 6.25 때 허위로 밀고해 죽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신 거라고 하지만 어머니도 밀고한 그 사람이 누구라고는 말씀을 안 했습니다."


오경대는 부친의 사망 일자를 모른다. 단지 함께 끌려갔다가 주정 공장에서 살아 돌아온 마을 사람이 언제 육지로 끌려갔다고 했던 그날을 제삿날 삼아 제사를 지내고 있을 뿐이다.

오경대의 구술 =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육지로 (끌려) 나간 날이 음력 6월 15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말만 들어서 추적하려고 해도 추적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육지로 끌려 나간 날로 제사를 지내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에 우리가 세월이 좋아져서 재판을 했어요. 서귀포 지역의 27명 정도 아는 사람들만 모여서 '삼면유족회'라고 만들어서 재판을 했는데 15년도에 무죄 판결이 났어요."

그러나 제주 4.3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경대씨 부친처럼 군경에 억울하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는데도 4.3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좌익 빨갱이로 몰렸다. 주변 사람들은 '뭔가 있었으니까 끌려간 것 아니냐?'라고 의심했다.

오경대씨는 그런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더욱이 부친이 빨갱이라는 의심을 넘어서 간첩이라는 명백한 허위의 사실을 이야기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 역시 간첩 혐의 전과자로 살고 있다 보니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오경대의 구술 =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나중에 내가 간첩 사건으로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그 소리가 생생하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4.3은 70여 년 전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진행되는 학살의 역사이고 청산해야 할 범죄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그날의 범죄로 제주는 여전히 4.3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공권력은 한때 4.3의 잔해를 헤집으며 먹잇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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