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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녀가 전란으로 허물어진 집 섬돌에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컬러 사진은 무척 귀했는데 NARA에 몇 장 소장돼 있었다(1951. 3. 1. 전주).
 한 소녀가 전란으로 허물어진 집 섬돌에 앉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컬러 사진은 무척 귀했는데 NARA에 몇 장 소장돼 있었다(1951. 3. 1.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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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릿재 공동묘지로 간 여동생
 

그해(1950년) 가을, 피란에서 돌아온 집집마다 한두 식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구미인 임은동, 광평동, 사곡동, 형곡동 일대는 1950년 8월 16일 정오 무렵 미 공군 B-29 전폭기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했다. 그래서 미처 피란치 못한 집은 가족들이 그 폭격으로 거지반 죽거나 다쳤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 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온 동네 집집마다 한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우리 앞집 김 목수 집 맏아들은 전쟁 중 행방불명됐다. 또 오거리 공씨네 술도가 집 외아들도, 그 옆집 참기름 집 아들도 전쟁 후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귀엣말로는 그들은 좌익으로 전쟁 중에 죽었거나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나의 바로 밑 여동생이 피란에서 돌아오자마자 홍역으로 죽었다. 병원에 미처 가보지도 못한 채, 입은 옷 그대로 새끼줄에 꽁꽁 묶여 항아리에 담겨 사돈어른이 지게에 지고 도량동 싸릿재 공동묘지에 묻었다.

막내고모는 그 조카가 불쌍하다고 공동묘지에 가서 실컷 울고 돌아오곤 했다. 나도 그곳에 몇 차례 따라갔다. 피란에서 돌아온 뒤 많은 동네사람들이 경찰서로 불려갔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들에게 부역한 사람을 찾아 혼을 내거나 교도소로 보낸다고 했다.

하구미 임은동 조아무개는 전쟁 중 잠시 동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두르고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된통 두들겨 맞고 장독(杖毒·매 맞아 생긴 상처의 독)으로 곧 죽었다.
  
 전차가 신작로를 지나 가는데 갓을 쓴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갓길로 가고 있다.
 전차가 신작로를 지나 가는데 갓을 쓴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갓길로 가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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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불려간 할아버지

어느 날 나의 할아버지도 경찰서에 불려갔다. 아마도 멀리 피란 가지 않은 채 유독 우리 집만 성하게 남은 것이 인민군들에게 편의를 봐준 것으로 억측을 낳았나 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은 걸핏하면 '북진통일' 등 전쟁을 계속 부추겨 애꿎은 조선 청년들 다 죽인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그 말이 경찰의 귀에 들어갔나 보다.

할아버지는 경찰서에 가자마자 군복을 입은 전투경찰에게 몽둥이로 몹시 두들겨 맞았다. 그 소문을 듣고 할머니가 단걸음에 경찰서로 달려갔다. 지난 난리 때 앞집 순경 부인 성주댁을 우리가 피란시켜줬다는 말과 그 사실에 대한 앞집 곰배 엄마의 인우보증으로 할아버지는 곧 풀려났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당신 발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모부가 업고 모셔왔다. 할머니는 북새통 피란길에 순경 부인 성주댁을 보호해 준 덕을 봤다고, 그 성주댁이 당신 영감 살렸다는 말씀을 하셨다.

피란 중 밤이면 북녘 보안대들은 노숙하는 곳으로 와서는 전짓불을 비추며 경찰이나 군인 가족이 없느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할머니는 성주댁을 끝까지 당신 며느리라고 극구 변호해 위기를 모면한 일도 있었다.
  
 두 노인이 담뱃대를 물고 지팡이를 짚은 채 미군들의 군사훈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1952. 4. 25.).
 두 노인이 담뱃대를 물고 지팡이를 짚은 채 미군들의 군사훈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1952. 4. 25.).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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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똥을 먹고 건강을 회복한 할아버지

할아버지 매 맞은 장독에는 민간요법으로 사람의 똥이 가장 특효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대변을 소여물 바가지에 봤다. 그런 뒤면 할아버지는 거기다가 막걸리를 한 사발 부어 코를 잡고 단숨에 들이켰다. 한 번은 내가 들에서 놀다가 급해 그곳에서 대변을 보고 돌아왔다. 그러자 할머니는 대신 고종사촌 아우의 똥을 받아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그 똥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가족들은 똥에도 촌수가 있는 모양이라고 해,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다녀온 뒤 처음으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내 똥을 드신 지 보름 만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자 할머니가 오금을 박았다.

"영감, 누구 땜시로 살아난 줄 아시오?"

애초 순경 부인 성주댁이 우리 가족 피란 행렬에 동행하는 걸 할아버지는 식구가 많다고 반대했다. 그 말에 할아버지가 겸연쩍게 동문서답처럼 대꾸했다.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 必有餘慶,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이라."

그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곧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들이 죄다 물러갔다. 그러자 곧이어 구미역 마루보시(통운) 옆 자리에는 철조망이 쳐졌다. 그 철조망 안에는 미군부대 퀀셋 막사가 들어서고 미군들이 개미들처럼 바글바글하게 몰려와 주둔했다.

그 언저리에는 뾰족구두를 신고 입술연지를 새빨갛게 칠한 누이들이 어정거렸다. 구미역 앞에는 미장원과 세탁소, 양키 물건 가게가 새로 생겨났다. 그 얼마 뒤 우리 집에서 빤히 보였던 금오산 꼭대기에 날마다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을 갈랐다. 그 불빛은 미 공군의 탐조등이라고 했다.
  
  미군이 두 소년의 피란 길을 도와주고 있다(1951. 3. 20.).
  미군이 두 소년의 피란 길을 도와주고 있다(1951. 3. 20.).
ⓒ 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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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로우! 기브 미 초콜릿!"

그 일로 금오산 꼭대기에도, 산 아래 남통동에도 미군들이 막사를 짓고 주둔했다. 구미 일대에 주둔한 미군들은 지프차나 GMC 군용 트럭을 타고 좁은 흙길을 마구 씽씽 달렸다. 그럴 때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소리쳤다.

"핼로우! 기브 미 초콜릿!(안녕하세요! 초콜릿 주세요!)"

그들이 껌이나 초콜릿을 던져주서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헬로우! 보이즈."

그 말에 우리는 의미도 잘 모른 채 주워들은 양말로 소리쳤다.

"댕큐, 베리망치!"
""양키, 넘버 원!"

하지만 그들이 흙먼지만 잔뜩 날리며 사라질 때는 손사랫짓을 하면서 소리쳤다.

"양키, 넘버 텐!"
"양키, 갓댐!"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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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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