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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
ⓒ 윤이상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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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9월 17일, 음악가 윤이상이 출생했다. 베를린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지낸 그는 1987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 훈장을 받았다. 유럽의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존경받았고,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의 '20세기 100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7년 7월 8일 우리나라의 중앙정보부는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독일 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암약하고 있는 간첩들을 대거 체포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은 6월 17일 윤이상을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했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던 세계적 화가 이응노도 이때 강제로 끌려 왔다. 이 일로 우리나라는 국가 신인도가 땅에 추락하고 세계적 인권 후진국으로 낙인이 찍혔다.

세계적 예술가들을 외국에서 납치

중앙정보부는 당시 203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재판에 넘겼지만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적용된 예는 한 명도 없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 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세계적 여론의 압박에 못이겨 2년 만에 윤이상과 이응노를 석방했던 박정희 정권은 두 사람이 다시는 조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윤이상이 1995년, 이응노가 1989년에 타계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건을 조작한 박정희 정권만이 아니라 이른바 '문민 정부'라는 김영삼 정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왜 세계적 명망을 자랑하는 두 사람의 귀국을 금지했을까? 아마도 책임을 감당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듯하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권력을 오용 및 남용만 하고 뒷책임은 지지 않는 정치독재와 행정독재를 '인간 소외' 현상을 일으키는 중요 요인의 한 가지로 꼽는다. 지도자가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면 그 주변에 타락한 인간을 양산하게 되고, 피해는 대중이 입게 되는 악질적 인간 소외 현상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윤이상 평화재단'의 게시물 중 일부를 읽어본다.     

1967년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됨.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류된 윤이상은 부인과 함께 기소되어 12월 13일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음. 부인 이수자는 5년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윤이상은 1968년 3월 13일 제2심에서 15년형 감형 처분, 이어 1968년 12월 5일에는 제3심에서 10년형으로 다시 감형.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납치되어 모진 고문과 가혹한 수형 생활을 당했다.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꾸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어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냈다.


윤이상과 이응노를 독일과 프랑스에 '가둬 놓은' 채 우리나라는 1988년 9월 17일 서울 올림픽을 열었다. 1991년 9월 17일(한국 날짜는 18일)에는 남북한 동시 UN 가입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졌다. 9월 17일, 윤이상의 생일이다. 조국에 돌아가고 싶어도 정부가 가로막아 귀국하지 못하는 채로 독일에 머무르고 있던 70대 노인 윤이상은 뉴스를 보면서 무슨 감회에 젖었을까?

그는 1944년 반일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2개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해방 조국에서는 강제 납치되어 2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1969년 3월 30일 서베를린으로 쫓겨간 이래 26년 동안 조국의 햇빛을 보지 못했다. 죽고 난 뒤 23년이 지나서야 독일에서 통영으로 묘소가 이장되었지만, 그것으로 나라가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주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에 생겨난 비극들

윤이상의 스물세 번째 생일인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전투 병력을 파견하는 한편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쳐부술 작전도 수립했다. 거사 예정 날짜는 1945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맞추어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해버렸다.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임정을 배척한 미군정은 광복군도 인정하지 않았다. 자주 독립을 이루지 못한 탓에 미국과 소련의 앞잡이처럼 극렬한 좌우 대립을 벌여야 했고, 그것은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윤이상 선생과 같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도 가까운 원인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 때문이지만 먼 원인은 미완의 독립 탓인 것이다.    

사망 23년 지나 우리나라로 이장된 그의 묘소 

2020년 9월 17일, 윤이상 선생 탄생 103주년을 맞아 〈윤이상 평화재단〉 누리집을 찾아본다. 재단 소개, 윤이상 소개, 자료실, 윤이상 하우스, 후원하기, 소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윤이상 소개에 들어가면 '윤이상의 삶', '윤이상의  음악', '작품 목록', '음반 목록', '음악 감상' 꼭지들과 만날 수 있다. 베를린에 있던 그의 묘소가 2018년 통영국제음악당 바닷가 언덕으로 이장되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주소를 찾아본다. 통영국제음악당의 주소는 경상남도 통영시 큰발개1길 38(도남동1)이고, 전화는 055-650-0400번이다. 언젠가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려면 이곳부터 들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윤이상 평화재단' 누리집을 참조해 썼습니다. 

태그:#윤이상, #이응노, #동백림간첩사건, #9월17일 오늘의역사,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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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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