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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의 남자현 묘소(가묘)
 서울 현충원의 남자현 묘소(가묘)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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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제작사 누리집은 친일파 및 밀정 처단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이 독립운동 영화를 '2015년 7월 22일 개봉, 감독 최동훈, 배우 전지현‧이정재‧하정우‧오달수‧조진웅‧최덕문 등, 관객 1270만6829명'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자 주인공 안윤옥은 5kg이 넘는 총을 들고 질주하면서 일본군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일제 헌병과 밀정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는가 하면, 예사로 지붕에서 땅으로 뛰어내린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는다. 관객 중에는 여자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영화니까!"하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여성 독립지사의 활발한 의열 투쟁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영화의 안윤옥 이상 가는 의열 투쟁을 벌인 여성 투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여성 의열 지사는 현계옥, 안경신, 박차정, 남자현 등이다.

현계옥은 의열단 초기 상해에서 직접 폭탄을 제조하여 국내까지 반입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쳤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파견한 결사대의 제2대에 속한 안경신 지사는 압록강을 넘어와 평양도청에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박차정은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전해 일제와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고 숨졌다.

남자현 또한 여성 의열 독립투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 공적 평가를 내려놓았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지사는 모두 92분인데, 여성은 남자현 지사 한 분뿐이다.(주1) 남자현 지사는 영화 〈암살〉의 여자 주인공 안윤옥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윤옥처럼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하였다.

영화와 현실은 그렇게 다르다

남자현은 1933년 우리 나이로 61세에 순국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스스로 생명이 다했음을 자각한 지사는 유복자 김성삼에게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거든 너의 자손에게 (내가 지금 하는 말과)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독립된 우리나라 정부에) 바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피묻은 손 안에는 중국돈 248원이 들어 있었다.

지사의 하나뿐인 아들 김성삼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 행사에 참석하여 어머니가 남긴 중국돈 248원을 김구와 이승만 앞에 내놓았다. 비록 현장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피묻은 그 돈을 받아든 이승만과 김구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으리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 또한 서울운동장에서 목놓아 통곡하였으리라.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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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운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1933년 8월 22일 마침내 남자현 지사가 숨을 거두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순국 앞에서도 울음을 토했지만 특히 장례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비통과 경탄 섞인 눈물을 쏟아야 했다. 수의를 입히려는 찰나 모습을 드러낸 그의 기막힌 속옷 때문이었다.

그녀의 속옷은 남정네의 적삼이었다. 그것도 핏자국이 뚜렷한 낡디낡은 것이었다. 그 속적삼은 37년 전 의병전쟁을 수행하다가 전사한 남편의 옷이었다. 그는 25세 이후 61세까지 줄곧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속옷으로 입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 옷을 입고 지내온 37년은 남편의 죽음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기어이 원수를 갚겠다는, 나라의 독립을 보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애잔한 사랑과 뜨거운 독립정신의 표상이었다. 어느 누가 그 피묻은 전투복 앞에서 눈물을 참을 수 있으랴!

37년 동안 남편의 피묻은 유품을 입고 생활

남자현은 1873년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태어나 19세이던 1891년 같은 면 답곡리의 김영주와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은 1896년 청송 진보 지역 전투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남자현도 남편의 의병 부대에 함께 참여했었다.

이후 남자현은 시어머니와 유복자를 돌보며 생업을 꾸려가던 중 3‧1운동을 맞았고, 평화로운 수단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압록강을 건넜다. 1919년 3월 9일 유복자 김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갈 때 그는 우리 나이로 무려 47세였다. 47세나 된 여성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혼자서 나라를 떠난 것이다!

만주에 간 남자현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펼쳐진 청산리전투에 참전한다. 독립군은 2800여 명밖에 안 되었지만 2만5천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맞아 1400~30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둔다. 아군 전사자는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현은 이 대첩에서 부상자 치료에 헌신하여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독립군의 어머니, 여자 안중근

그에게는 또 다른 별명도 있다. '여자 안중근'이다. 이 별명은 1932년 5월 9일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온 일로 생겨났다. 일본의 만주 침략 실상을 파악하려는 목적에서 국제연맹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조사단에 자료 또는 의견서를 제출하려 했다. 일제가 두고만 볼 리 없었다. 결국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이 처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김곡도 총살을 당했다.(주2)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생가터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생가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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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썼다. 그리고는 혈서와 잘린 손가락을 함께 하얀 옥양목에 고이 쌌다. 그는 인력거꾼에게 부탁하여 조사단의 숙소인 마디얼 호텔로 옥양목을 보냈다. 결국 일제의 검문에 걸려 혈서는 조사단에 전달되지 못했지만, 혈서의 내용과 그가 무명지를 잘라 혈서를 쓴 사실은 천파만파 퍼져나가 우리의 독립 소원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이날 이후 그녀는 '여자 안중근'이 되었다.

1925년에는 채찬, 이청수, 박청산과 함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처단 거사를 도모해 4인으로 암살단을 조직했다. 단장 남자현을 비롯한 암살단은 4월 중순 권총과 포탄을 준비하여 서울 혜화동 28번지로 잠입했다. 하지만 일제의 철통같은 경계에 때를 잡을 수 없었고, 정탐을 나갔던 박청산이 체포될 뻔한 위기까지 맞았다. 암살단은 어쩔 수 없이 만주로 돌아왔다.

주 만주 일본 전권대사 처단 시도

1933년 일제는 중국 동북부 지역을 강점하여 괴뢰정권을 세운 1주년 기념 행사를 3월 1일에 연다고 떠들어댔다. 1월 20일 남자현은 문익빈, 이규동, 이춘기, 손보현 등과 함께 행사장에서 주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처단하기로 결의했다.

2월 27일 남자현은 남편의 피 묻은 적삼을 속에 입고, 그 위를 거지복장으로 덮었다. 하지만 조선인 밀정 이종현의 밀고로 이미 손보현이 체포되었고, 남자현도 품에 숨긴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두 개와 함께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61세나 된 할머니 남자현을 하루도 빠짐없이 악독하게 고문했다. 거물 항일지사였으니 많은 고급정보를 알고 있을 터, 그것을 캐내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남자현은 입 한 번 떼지 않았고, 8월 6일부터는 음식을 거부했다. 보름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자 이윽고 남자현은 죽음 앞에 이르렀다. 일제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풀어주었다.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그가 누워 있는 조선여관으로 달려왔다. 남자현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중국돈 248원을 손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잘 테니 깨우지 말라"며 눈을 감았는데, 그것이 영면이었다.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사당에서 보는 '남자현'
 경북 영양 남자현 지사 사당에서 보는 "남자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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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얼빈 외국인 묘지 중 서쪽의 조선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1958년 도시 재개발 때 이곳 외국인 묘지가 황산 묘지로 옮겨가는 와중에 남자현의 묘는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서울 현충원에 있는 그의 무덤은 가묘(假墓)다. 안중근의 묘가 가묘이듯이 '여자 안중근'의 묘 또한 가묘이다.

현충원 묘소를 참배한 뒤 그를 더 기리고 싶으면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석보로 208 남자현 생가터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 그의 집과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가 있다. 사당도 있으니 이번에는 지사의 사진을 바라보며 진짜 참배를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기일에 맞추지 못하고 늦게 온 송구함에 덧없이 눈물이 흐를 터인데, 그것을 어찌하려나 걱정될 따름이다. 

(주1)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모두 30분이다. 그 중에는 임시정부에 30만원의 군자금을 지원해준 중국 송미령 여사가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9년 2월 26일 정부는 유관순 열사를 대한민국장으로 승격시킨다고 했으나 2020년 8월 22일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록 대한민국장 추서자 명단에는 유관순이 올라있지 않다.
(주2)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김곡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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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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