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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국가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으로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 4.3 이후 또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살고 있었던 친인척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을 다녀왔다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받은 월급이 공작금이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고문당했던 터, 공간과 마주하고 주변의 사물을 탁본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파괴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이들의 용기에 수상한집과 평화박물관이 함께 응원합니다.[기자말]
조금은 기온이 올라 덥게 느껴지던 지난 5월 중순 제주. 간첩조작 피해 기억공간인 '수상한집'에 수상한 사람 넷이 모였다. 강희철, 강광보, 김평강, 오경대. 

중문에 살고 있는 오경대씨는 아침 일찍 차를 몰고 제주시의 이곳 수상한집까지 왔다. 나이 70을 훌쩍 넘긴 이들이 모인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생을 괴롭혀온 기억의 질감을 확인하고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목탄을 이용해 한지에 기록하는 작업, 질감의 기억을 위해서 모인 것이다.

이들이 찾아다닐 곳은 자신들이 살았던 곳이나 과거 강제로 연행되어 수사를 받거나 현장 검증을 받은 곳들이다.

누구에게는 경찰서, 누구에게는 보안대, 누구에게는 중앙정보부 등 모두 각기 다른 경험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제주에 살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기억을 질감으로 남기려 한다. 고통스러운 대면이지만 한지와 목탄을 이용해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기억해야 할 무언가를 한지에 목탄으로 남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한지에 덜어지길 소망하며 탁본 길을 떠났다.

수상한집에서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준비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이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곤을동 마을이다. 곤을동은 강광보의 고향이자 4.3 학살의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이제는 옛 지명만 남은 곤을동은 4.3 때 마을 전체가 전소되어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곤을동에 선 강광보가 입을 열었다.

사라진 마을
  
 곤을동 마을을 탁본하는 강광보씨.
 곤을동 마을을 탁본하는 강광보씨.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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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곤을동이 왜 곤을동이냐면, 물이 흘러 내려오다 이 앞에서 물이 고였다 해서 곤을동이라고 했다는 거야. 여기 곤을동 청년들이 옆에 화북이나 삼양 청년들보다 좀 쎘어. 다른 마을 청년들보다 단결도 더 잘하고 그랬지. 그랬던 이 마을이 왜 국군들한테 이렇게 됐느냐면 함덕으로 가던 군인들이 요 마을 앞에서 습격을 받은 모양이야. 그런데 그 습격한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이 곤을동 쪽으로 도망을 간 거지. 그래서 이 곤을동 마을을 아주 싹 쓸어버렸어."

곤을동 마을로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나 80세가 넘은 고령의 이들이 닿기에는 험한 길이었다. 힘겹게 다가간 곳에는 돌담만이 남아 이곳이 과거 마을이었음을 짐작게 할 뿐이다. 20여 가구가 살았다는 마을은 이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강광보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4.3유적지 표지를 탁본함으로써 고향 마을의 기억을 기록했다.
  
 자신이 살았던 곤을동 마을 입구 비석을 탁본하는 강광보씨.
 자신이 살았던 곤을동 마을 입구 비석을 탁본하는 강광보씨.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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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을 마친 그가 찾아간 곳은 곤을동 마을 옆에 자리한 사라봉의 등대 자리였다. 정식 명칭은 '산지항로표지관리소 등대'이다. 이곳은 이날 모인 네 사람의 기억이 공통으로 닿아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적은 강희철의 말을 빌리자면 '조작 간첩의 필수 코스'라는 곳이다.
  
 사랑봉에 올라 탁본하는 일행. 이곳은 제주에서 간첩으로 조작되는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들렀던 곳이라고 한다.
 사랑봉에 올라 탁본하는 일행. 이곳은 제주에서 간첩으로 조작되는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들렀던 곳이라고 한다.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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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 등대 옆에 예전에 작은 매점 같은 게 있었어. 그 매점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르곤 했는데 경찰이 제주항이랑 등대를 탐지하려고 거길 들렀다고 조작해버렸지 뭐야. 지금은 그 매점이 사라져 버렸는데 제주경찰서 수사관 놈들이 제주항이랑 저 등대를 탐지했다고 얼마나 고문을 하고 때리는지... 아이고."(강희철)

"요 위(사라봉)로 올라가면 팔각정이 있어. 보안대 조사받을 때 그 팔각정 올라가서 그 아래를 내려다 보라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수사관이 나더러 그러더라고.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거 다 북한에 보고하려고 한 거지'라고... 그때는 저기 신항이 없었고 다 바다였어. 탑동 쪽에 항구만 있었지. 여기 제주항은 간첩코스야."(강광보)

"칠성통(제주시 칠성로) 안에 안기부 건물이 있었어. 무슨 무역회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어. 낮에는 거기서 조사를 받고 밤이면 저기 제주항 쪽에 있던 헌병대 유치장에서 자고 그랬어."(오경대)

"나도 사라봉에 올라왔었어. 제주항이랑 등대 쪽을 손을 들어 가리키라고 하고서는 사진을 찍었어. 현장 검증할 때 그랬지."(김평강)


네 사람은 한참을 등대 쪽 바다를 바라보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식당 근처에 있는 작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예전에 보안대가 있던 자리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안대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조차 이곳에 과거 보안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주변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강광보씨가 모습이 바뀐 아파트에서 보안대의 건물 위치를 설명하는 동안 오경대씨와 강희철씨는 각자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 놈들이 그렇게 악질이야

"감옥에서 나와 노무현 대통령 때까지(1991년부터 2007년경까지) 한 달에 한번 어디를 갔다, 누구를 만났다, 이런 보고를 서귀포경찰서 가서 매월 했어. 만약에 내가 쓴 거 하고 (자기네들이 아는 것이) 다르면 당장 들어오라고 해가지고 왜 틀리게 썼냐, 왜 빠뜨렸냐, 누굴 만났냐 막 추궁을 해. 그걸 수십 년 당하고 나니까 차라리 감옥이 낫더라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경찰들이 포섭해 가지고 정보원으로 삼는 거야. 나 감시하라고. 그래서 나하고 잘 아는 사람도 나를 감시하고 그러더라니까."(오경대)

"나도 그렇게 했다니까. 나 잘 아는 친구를 정보원으로 붙여서 나도 모르게 몰래 감시를 하고 그랬어요. 한 번은 내가 고문 당한 일을 방송국에서 취재한다고 하니까 날 조사했던 '좌대수'라는 수사관이 밥 먹자고 불러요. 그래서 나갔는데 느낌이 이상한거야. 그래서 밥만 먹고 어디 가자고 해도 안 간다고 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놈이 내 약점 잡으려고 녹음기까지 켜놓고 왔더라고. 그 놈들이 그렇게 악질이야."(강희철)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버린 보안대 지하고문실 입구 터를 탁본하는 강광보씨.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버린 보안대 지하고문실 입구 터를 탁본하는 강광보씨.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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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강광보씨는 기억을 더듬어 보안대가 있었던 지금 아파트 자리의 바닥, 쇠창틀 등을 탁본했다. 보안대에서 수십 일간 감금되어 있던 기억과 맞닿아 있는 쇠창틀과 보안대에 감금되어 있을 때 수사관에 의해 끌려다녔을 바닥이었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차가운 쇠창살의 촉감과 단단하고 메마른 바닥시멘트의 질감은 그날의 그것이 아니더라도 생생히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자신이 고문을 당했던 보안대 터 탁본을 마치고 강광보씨가 걸어왔다. 하루 종일 고통스러운 기억의 공간을 다녀 지치고 힘들었을 그에게 오늘 탁본 작업이 괴롭고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강광보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힘들지. 왜 안 힘들겠어. 그래도 신기한 것이 이곳에 다시는 오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와지네. 소름끼치고 겁도 나고, 괜히 (만지면) 기억이 떠오를까봐 싫었는데 그래도 만져지네. 만져지니 별 거 없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와 보니 그래도 무섭고 긴장됐던 마음이 좀 풀어지네. 저 종이에 내 기억이 딱 새겨져서 내 머릿속에서 나갔으면 좋겠네."(강광보)
  
 강광보씨의 탁본
 강광보씨의 탁본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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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보씨를 비롯해 강희철, 오경대, 김평강씨 모두 같은 바람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저 한지에 새겨지길. 그래서 조금은 가볍고 행복한 기억이 그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것은 모두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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