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소재로 베트남전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평소 알고 지낸 예비역 중위 김우영씨에게 톰 파이필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흥미로웠다.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어 김우영씨의 소개로 파이필드씨와 메신저로 이야기도 나눴다. 아래의 기사 내용은 이 둘의 인터뷰와 직접 확인한 것을 바탕으로 썼다. - 기자말

톰 파이필드(Tom Fifield)씨에겐 평생의 숙제가 하나 있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미군 UH-1 헬기 기관총 사수 및 정비 반장으로 근무했던 참전용사 예비역 상병이다. 1972년 1월 베트남 나짱(Nah Trang) 지역에서 보급 임무를 같이 수행했던 한국군 한 명이 전사했다.

이름 모를 그 한국군 사병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지만, 끝까지 그의 손을 잡고 혹시나 기적을 바랜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수십 년 지난 지금도 안타깝던 날의 그 순간은 악몽으로 매일 밤 찾아왔다. 날짜도 희미해졌지만 바로 옆에서 전사한 이 한국군이 누구인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그때 전사한 병사 이름이라도 알아내 늦게나마 명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Tom Fifield씨는 해마다 베트남참전용사기념관을 방문해 전사한 전우의 명복을 빈다.
 Tom Fifield씨는 해마다 베트남참전용사기념관을 방문해 전사한 전우의 명복을 빈다.
ⓒ Tom Fifield

관련사진보기


 미국 월남전연구단체 VietnamWarHistoryOrg(VWHO)는 미군 참전용사, 남베트남 참전용사, 베트남전 학자들 모임이다. 2012년 에릭 빌라드(Erik Villard)씨가 페이스북에서 시작해 2020년 7월 기준 회원이 약 3만 6천여 명이다.

포항에서 해병 중위로 제대한 김우영씨는 이 단체 운영진 중 한 명으로, 큰아버지가 월남전에서 전사한 국가유공자다. 그가 미국 유학 당시, 월남전전문사이트 '월남전과 한국(vietvet.co.kr)'과 VWHO 두 그룹을 교류한 덕에 베트남에서 함께 싸웠던 한국군과 미군 전우가 50여 년 만에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2015년 9월 말 김우영씨는 VWHO 회원인 톰 파이필드씨의 연락을 받았다, "1972년 1월 9일쯤 베트남 나짱에서 작전 중 전사한 한국군 이름을 꼭 알고 싶다"라고. 김씨는 곧 1972년 1월 한국군 월남전 작전 자료를 모아 조사했다. 월남전의 경우 6·25 전쟁처럼 대규모 전투가 없었고, 대부분 소규모 교전이 주류였다. 큰 작전은 철저한 통제에 따라 수행돼 대량 실종자나 손실은 거의 발생 안 한다.

따라서 파이필드씨가 탄 헬기에서 전사한 한국군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파이필드 사연을 월남전 관련 사이트 등에 공유했고, 얼마 후, 국가보훈처, 해병전우회, 파월한국군 전사 등에서 그때 전사한 한국군이 김상복 상병이라는 걸 확인했다.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파이필드씨는 만약 그의 묘를 찾는다면 자기 대신 술 한잔 올려 달라 부탁했다.
 
매년 현충일이면 김씨는 국립현충원 큰아버지 묘를 참배 후, 김상복 하사의 묘를 찾아 꽃과 술잔을 올리고, 사진을 찍어 파이필드씨에게 보낸다.
 매년 현충일이면 김씨는 국립현충원 큰아버지 묘를 참배 후, 김상복 하사의 묘를 찾아 꽃과 술잔을 올리고, 사진을 찍어 파이필드씨에게 보낸다.
ⓒ 조마초

관련사진보기


그 후, 매년 현충일이면 김우영씨는 국립현충원 큰아버지 묘를 참배 후, 김상복 하사의 묘를 찾아 꽃과 술잔을 올린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파이필드씨에게 보낸다. 파이필드씨와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먼 이국땅에서 산화해 찾는 이 없이 외롭게 잠들어 있는 이들을 잊지 않고 명복을 비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 년 중 현충원이 가장 붐비는 날은 6월 6일 현충일이다. 그러나, 월남전이나 한국전쟁 묘역은 쓸쓸하다. 부모, 형제가 해마다 찾아오나 수십 년이 흐르면서 사병 같은 경우 대부분 미혼으로 후손이 없기에 묘를 찾는 이가 거의 없다. 김상복 하사의 묘를 찾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김우영씨는 말한다. 그가 큰아버지 묘를 참배한 후 김 하사의 묘를 찾기에 연고자들이 먼저 참배하고 떠났을지도 모르겠지만. 

1954년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파병을 제안했으나, 당시 프랑스가 반대했다. 그 후, 미국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편에서 전쟁을 시작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자유중국 등이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이자 최초 해외 파병이었던 대한민국 국군은 1964년 9월 11일부터 1973년 3월 23일 파리협정에 따라 철수할 때까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과 싸웠다. 9년 가까운 기간 연인원 30만 명, 최대 5만 명을 파병했다. 그 동안 11,232명이 부상했고, 5,099명이 전사했다.

1972년 1월 7일~26일간 한국군 동보 18호 작전이 있었다. 베트콩과 월맹군이 나짱 서쪽 산악지 혼쥬산 일대에 모여 구정과 춘계 대 공세를 준비할 때, 아군은 2단계로 포위와 정찰을 전개해 지역 내에 있는 적을 섬멸했다. 이 작전에서 적 124명 사살, 아군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10명이었다.

1972년 1월 13일, 새벽 동이 트자 한국군 9사단(백마부대) 30연대 수색중대본부는 정글에서 작전 중이던 1소대 재보급을 위해 미 육군 UH-60 공격헬기중대(60th AVN CO ASLT HEL) 소속 헬리콥터에 보급품을 실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 육군 UH-60 공격헬기중대(60th AVN CO ASLT HEL) 부대원들. 좌측에서 4번째가 Tom Fifield씨다.
 베트남전 당시, 미 육군 UH-60 공격헬기중대(60th AVN CO ASLT HEL) 부대원들. 좌측에서 4번째가 Tom Fifield씨다.
ⓒ Tom Fifield

관련사진보기


파이필드 상병, 중대 보급장교와 김상복 상병이 탄 헬기의 프로펠러가 아침 공기를 날카롭게 찢고, 공중으로 흙바람을 일으켰다. 곧 귀국하는 김 상병은 정들었던 1소대장과 소대원에게 작별 인사하러 동행했다.

원래 헬기가 보이면, 아군은 착륙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주황색 연막탄을 터뜨린다. 그런데, 종종 베트콩과 월맹군은 근처 다른 위치에 같은 색 연막탄을 터뜨려 미군 헬기를 당황케 하고, 또 가까이 노출된 헬기에 집중 사격해 피해를 줬다.  

1소대는 보급품 수령을 위해 126고지 남쪽 평탄한 갈대밭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헬기는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1소대와 무전 교신을 유지하며 보급품 전달을 위해 착륙지점을 선회했다. 지상 두 군데에서 동시에 연막탄이 피어올랐다. 파이필드 상병은 경험 많은 김상복 상병에게 어느 쪽이 한국군의 연막탄인지 확인을 부탁했다.

헬기가 지상으로 낮게 접근한 순간 북쪽 언덕에 매복했던 베트콩 무리가 헬기에 총알을 퍼붓기 시작했다. 공중을 선회하던 헬기 동체를 다섯 발이 뚫었는데, 그중 한 발에 김 상병이 맞고 힘없이 쓰러졌다. 파이필드 상병은 붕대로 피가 흐르는 김 상병의 머리를 감쌌다. 

이미 맥박이 없는 그의 손을 꽉 잡고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보급장교는 보급품 투하를 중지하고 급히 나짱 102 이동병원으로 헬기를 돌렸다. 병원에 도착했지만 김 상병은 이미 숨이 끊어졌다. 24살을 2주 앞둔 날이었고, 이틀 후 귀국선을 탈 예정이었다. 

고 김 상병은 전사자 행정 처리 사후 무공포장을 받고 김상복 하사로 추서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1년 후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태그:##조마초, ##베트남전쟁 , ##MACHO CHO, ##마초의 잡설 , ##월남참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