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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나와 공원 둘레를 걷는다
▲ 부천 중앙공원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나와 공원 둘레를 걷는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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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 공원을 걸었다. 한 바퀴 도는 데 1.6km, 4바퀴를 돌고 나니 만보기의 숫자에 만 보가 채워졌다. 이 년 전부터 매일 만 보를 계획하고 드문드문 만 보를 채웠는데, 이렇게 돌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그제보다 어제가 수월했고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더 수월한 것 같았다.

걷다 보면 앞서가는 사람이 많다. 몇 해 전, 몰아서 일주일의 운동을 하던 주말에 마음먹고 걸을 때만 해도 앞서가는 사람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그보다 조금 더 앞서가야 했고, 또 앞서 가는 다른 이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싫어 뛰다시피 걸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추월하며 걷다 보면 뒤처지지 않아 좋기는 한데 걷는 내내 힘이 들었다. 힘이 들어도 힘이 부치게 걸어야 운동을 대신한 걷기라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이번에는 뒷사람이 나를 추월해 앞서가고, 더 멀어져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옆에서 걷던 남편이 말했다.

"사람들이 왜 자꾸 추월해서 가지? 우리가 느리게 걷나?"

스스로의 걸음이 느린 것에, 느리다고 느끼지도 못한 채로 뒤로 밀리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물음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서둘러서 쫓아가자고 말했겠지만 이번엔 천천히 가자고 했다.

"좀 천천히 걸으면 어때. 이렇게 걸어야 지치지 않고 딱 좋아."

정말 딱 좋았다. 한 사람씩 먼저 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지 않는 걸음걸이 덕분에 만 보를 걸을 수 있었다.

앞서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나이 든 노부부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자주 만났다. 우리보다 10년쯤 더 사신 것 같은 분들, 혹은 20년쯤 더 사신 듯한 부부, 그보다 조금 더 사신 부부의 걸음을 두루두루 만났다.

한쪽으로 기울 듯 말 듯 걷는 걸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우리도 저 나이쯤 되면 저 정도 걸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묻기도 했다. 우리도 10년쯤 후에 저렇게 걸을 수 있겠지. 20년쯤 후에는 우리도 저 정도의 모습으로 걷겠지. 지금 걷는 것처럼 그때까지 꾸준히 걸을 수 있다면 아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원미산 오르는 입구 계단, 계단에 산에서 지켜야 할 안내사항이 적혀 있다.
▲ 원미산 입구 원미산 오르는 입구 계단, 계단에 산에서 지켜야 할 안내사항이 적혀 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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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면 걷는 장소를 바꾼다. 산길을 걷는다. 몇 해 전만 해도 한창 꽃이 필 때만 진달래 구경삼아 한 번씩 오던 곳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올해 꽃 축제는 진작 취소되었고 그러고도 한참을 오지 않았던 산행이었다. 

여름의 절정이라 세상은 온통 초록 초록했다. 다양한 꽃도 사이사이 만개해 있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정상까지 산을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높이로만 보면 원미산은 167미터의 별것 아닌 얕은 산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급경사의 오르내리는 구간이 여러 번 있어서 운동의 강도는 좀 있는, 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산 타는 맛이 있다고 하는 산이었다.

시작하는 지점의 경사로에 만들어진 계단에는 등산객을 위한 주의 사항이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동물들이 놀라니 소리 지르지 말 것, 코로나 시대이니 여럿이 함께 오지 말 것, 열매는 산에 사는 생물들을 위해 남겨둘 것 등등이었다.

삶에도 경고 또는 안내가 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거듭되는 친절한 안내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때를 지나왔다. 지금은 잘 듣는다. 꼼꼼히 본다. '아~ 이래서! 맞아, 그래야지.' 긍정하고 새긴다.
 
치유의 숲 안내문
▲ 원미산 입구의 안내문 치유의 숲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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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 붙은 안내사항을 보며 오르다 보니 숨이 가빠진다. 호기롭게 따라나섰는데, 시작부터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땅만 보고 묵묵히 걸었다. 한번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끝이 없어 보이는 나만의 사투가 시작된다.

땅만 보고 가쁜 호흡을 터트리다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비명이 나올 때쯤, 드디어 쉼터가 나왔다. 사람들이 많았다. 가뿐하게 올라온 듯한 그들의 평온한 표정이 감탄스러웠다. 혼자서 벌건 얼굴에 땀에 젖어 엉킨 머리카락을 말리며 쉼을 만끽했다. 절대로 일어서지 않을 것처럼.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더 쉬면 오히려 힘들다고 옆에서 설득한다. 5분 정도의 짧은 휴식, 물 한 모금 더 마시고 출발했다. 다행인지 잠깐의 내리막길이 이어지며 여유를 찾는다.

삶도 그런 것 같다. 숨넘어갈 것처럼 온몸의 기운을 다 쏟으며 간신히 첫 고비를 넘는다. 아직 대여섯 개, 혹은 그 이상의 구비구비가 남았겠지만 인생이라는 낯선 길, 앞을 모르니 당장은 살 것 같다. 또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르니 용감해지기도 한다. 이제라도 멈추어야 하나 싶었는데,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 올라온다.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 길이 나왔다. 올라갈 때는 적당한 보폭으로 내딛는 발이 박자를 맞춰야 한다. 적당한 한 보에 무거운 발걸음을 턱 내려놓는다. 리듬을 타야 잘 오를 수 있다. 조절을 못하면 다시 호흡이 엉망이 된다.

헐떡이는 나를 보며 남편은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를 만들어 주었다. 구부러진 나뭇가지지만 지팡이처럼 짚고 오르니 그냥 오를 때와 달리 한결 수월했다. 걸음 한 보에 지팡이도 한 보, 무거운 발걸음 탁. 삼박자가 이어진다.

얕은 산을 오르면서도 들고 다니는 등산 스틱을 뜨악한 시선으로 본 적이 있었다. 지팡이를 들자마자 괜히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처음 올라온 고개만큼의 강도를 지팡이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쓰러져 뒹굴던 나뭇가지가 내게 힘을 준다.

네 번을 오르내리고 다섯 번째 오르니 정상이었다. 오르고 내리는 높낮이의 차이가 있었지만 끝났다 싶으면 다시 시작되는 오르내림에 지쳐갈 즈음이었다. 산에서는 오르다 보면 이렇게 정상을 맞는다. 잠깐씩 헐떡이며 걸었어도 정상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있다. 마음 편한 휴식도 있다.
 
원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천의 스카이라인
▲ 부천의 스카이라인 원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천의 스카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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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삶에 정상을 맞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돈을 많이 벌면? 높은 직에 오르면 정상일까?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에는 정상은 없는 것 같다. 가파른 길과 평평한 길의 반복이 있을 뿐. 때론 호흡이 힘들기도 하고 때론 호흡이 고르기도 하고. 그때그때 사정에 맞춰 조금 더 쉼을 허락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어제 여유 있게 걸었으면 오늘 다소 숨이 차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서도 노익장을 만났다. 손자들과 함께 오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장난처럼 아이들 손에 이끌려 오르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 이끄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르신들은 손자를 향해 네 덕에 수월하게 올라왔다고 격려하기도, 너도 누군가를 이끌만한 힘이 있다고 응원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이 들면 어린 손자에 기대어 산을 오를 수도 있다는 스스로의 노년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집에서 나서서 산 정상에 오르고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시간 30분, 걸음 수는 1만 5000보. 평지도 걷고 산도 걸으며 나이가 허락하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갔다.

어쩌다 잠시 지난 시간을 추억하면 몇 년은 가볍게 뛰어넘는 기억들뿐이다. 만 보의 계획도 어느새 2년 전의 계획이다. 두 달 전의 시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인데, 어제를 떠올리려 하면 시간은 무섭게 지나와 있다.

걸을 땐 뒤를 돌아보지 않는데, 시간의 셈법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지나온 시간의 기억들을 담으며 나를 돌아보고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나이가 드니 앞으로의 나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의 내가 곧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줄 것이고,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면 어디에 무엇이 되어 있건 어떠랴 싶다. 

태그:#세월의 속도, #오늘의 의미, #중앙공원, #원미산, #만 보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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