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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7일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에서 ‘성기성형 없는 트랜스젠더 여성 성별정정 신청 사건’의 심문기일이 열렸다.
 2016년 2월 17일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에서 ‘성기성형 없는 트랜스젠더 여성 성별정정 신청 사건’의 심문기일이 열렸다.
ⓒ 한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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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성전환 수술, 즉 외부성기 수술 없이도 남녀 성별을 변경하는 성별정정을 막아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게시되었다.

청원의 요지는 지난 달 21일 개정된 대법원의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의 내용이 여자화장실 및 탈의실에서 성범죄를 늘릴 우려가 있고, 여성 스포츠 경기에 '생물학적 남성'이 참여할 가능성이 있으며, 호칭 및 병역·결혼 제도에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청원에 동참을 독려하는 목소리는 보수 단체와 우파 개신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삽시간에 퍼졌고 19일 18시 기준 1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동의의 뜻을 표했다.
 
어떤 내용으로 지침이 개정되었기에 이토록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가. 지침의 주요 개정 내용을 보면 필수 제출서류였던 ▲ 2명 이상의 정신과 전문의 진단서나 감정서 ▲ 성전환 시술 의사의 소견서 ▲ 생식능력이 없다는 전문의 감정서 ▲ 가족관계증명서 ▲ 2명 이상의 성장환경진술서 및 인우보증서가 참고 서류로, ▲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는지 여부가 참고 사항으로 바뀌었다.

여자 화장실이나 여탕에 들어가려고 법적 성별 정정을 한다?
 
그렇다면 변경된 지침의 내용이 청원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문제를 야기할 것인가. 우선 여자 화장실 및 탈의실에서의 성범죄 증가 우려에 대해 살펴보자. 청원인은 지난 2월 여성 목욕탕에 이른바 여장 남자가 출입한 사실을 거론하며, 변경된 지침의 내용이 적용되면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로 점철된 것에 불과하다.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스스로 긍정하고 트랜지션을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겪는 고통과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한국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지금까지의 삶과 일상이 모두 단절될 수 있다는 두려움의 무게를 잠시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트랜스젠더를 '치마 입고 여탕에 들어가려고 법적 성별 정정을 하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식으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라. 당신이 트랜스젠더라면 구태여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공중목욕탕을 가고 싶겠는가. 트랜스젠더는 그저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 부정하지 않으며 살고 싶을 뿐이다.
 
트랜스젠더 선수 스포츠 경기 참여 문제, 해외에서는 논의 진전

다음으로 여성 스포츠 경기에 생물학적 남성이 참여할 수 있다는 우려를 살펴보자. 실제로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경기 참여에 관한 이슈는 제기된 지 오래다. 200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트랜스젠더 선수에 대한 규정을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공정성과 참가자의 인권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IOC와 스포츠 팀 그리고 당사자인 트랜스젠더 선수들은 십여 년이 넘는 연구와 토론, 실험을 통해 트랜지션 이후 선수의 신체에 발생하는 상태 변화를 기록해 공유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트랜스젠더 선수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전시켰다.
 
논란과 우려, 이견은 있을 수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우리가 낯섦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낯섦을 해결하는 길은 IOC나 외국의 사례처럼 트랜스젠더 선수의 스포츠 경기 참여에 관한 일련의 사회적 논의를 하는 것이다. 생식능력 제거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을 무작정 저지하려고 스포츠 이슈를 제기하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면 돼

마지막으로 호칭 및 병역·결혼 제도에 혼란이 야기된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이 문제는 간단하다. 정정된 법적 성별에 따라 호칭을 하면 되고, 그에 맞추어 병역이나 결혼의 문제를 처리하면 그만이다. 여기서 내가 어떤 외형의 성기를 가지고 있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호칭이나 결혼제도에 있어 야기되는 근본 혼란을 없애는 방법은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동성결혼을 비롯한 혼인평등을 법제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보라.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아닌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번 개정된 지침에 대한 청원인의 주장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거나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나는 이번 지침의 개정 목적 및 취지가 트랜스젠더의 존엄과 기본권을 보장하면서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서류 제출이나 조사를 없애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지난 2006년 대법원이 트랜스젠더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법적 성별정정을 인정하고 관련 사무처리지침을 마련한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아울러 국제인권규범에 기반을 둔 국제사회의 명확한 입장과 그에 따른 권고를 이행하고, 대법원 스스로 법적 성별정정을 허가하기 시작한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 판단기준을 마련하려고 지침을 개정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정정, 국제사회 태도는 단호

2014년 유엔인권최고대표부, 유엔에이즈, 유엔개발계획, 세계보건기구 등의 7개 국제기구는 '강제적, 강압적, 그 외 비자발적 생식능력 제거의 철폐'라는 제목의 관계기관 합동성명을 발표하고 "성별에 부합하는 대우와 성별표시의 변경을 위한 요건으로서의 생식능력 제거 요건은 신체적 온전성, 자기결정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트랜스젠더와 간성(Intersex)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초래하고 영속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법적 성별정정의 요건으로 삼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2015년 11월 5일 유엔자유권위원회는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과도한 제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용이하게 할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직접 권고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생식능력 제거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정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확하다. 국제사회의 주요한 일원으로서 글로벌 추세를 선도해나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유독 인권에 관한 문제 앞에서만 침묵하는 위선적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바라건대 청원인이 청원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맹목적인 차별이나 혐오의 발화가 아니라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간절한 염원의 실현이라면,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법적 성별정정을 신청하기까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경청해주기를 소망한다.
 
누가 굳이 나서 보태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무례하다.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받을 권리로써, 성기 사진을 제출하라는 요구 따위를 하는 판사를 법정에서 만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숨기거나 보태지 않아도 법적 성별로 정정할 공정한 기회를 주자는 것. 그것이 이번 대법원 성별정정 허가신청사건 처리에 관한 지침 변경의 참뜻이 아닌가 싶으므로.

태그:#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트랜지션, #성전환,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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