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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노동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에 헌신해왔던 최정규 선생이 3월 3일 독일에서 별세했습니다. 육성철 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이 최정규 선생을 기리는 '추모의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와 싣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편집자말]
 
2010년 연말 독일 보쿰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발언하는 고 최정규 선생님.
 2010년 연말 독일 보쿰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발언하는 고 최정규 선생님.
ⓒ 육성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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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정규 선생님은 1950년 5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향년 일흔에 독일 보훔에서 눈을 감았다.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머슴을 살다가 파독광부가 됐다. 독일에서는 오펠자동차 노동자로 일했고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사회현실에 눈을 떴다. 격변의 시기에 노동조합(전노협)과 진보정당(민주노동당) 운동에 참여했고, 말년엔 사회연대쉼터에서 땀을 흘렸다.

독일 보훔의 집에서 '떡볶이 배틀'을 벌이다

나는 10년 전 우연한 계기로 보훔 집에서 여러 날 묵었다. 그때 선생님은 손수 담근 김치와 장아찌를 보여주셨다. 선생님의 권유로 사모님과 떡볶이 배틀을 벌였는데 나는 한국식 빨간 떡볶이를, 사모님은 퓨전식 하얀 떡볶이를 만들었다. 캐스팅 보트를 쥔 내 아들이 사모님에게 표를 던지는 바람에 낙심한 기억이 있다.

그날 저녁 선생님은 자신의 컴퓨터를 열어 틈틈이 정리한 원고를 보여주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4시간 가까이 열독했는데, 선생님은 한 파트가 넘어갈 때마다 추임새를 넣으셨다. 어린 손자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신 할아버지, 오줌을 싼 날 아침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닌 소년, 빚에 쪼들려 농약을 마시고 죽은 빈농의 이야기는 내가 자란 고향마을과 닮아서 금세 느낌이 통했다.

12월 31일 밤이었을 게다. 보훔에 사는 교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송년회를 열었다. 선생님은 나를 여러 사람에게 소개했는데 한분 한분 사연이 남다른 경계인들이었다. 멀게는 동서독이 분단돼 있던 시절부터 가깝게는 송두율 교수 귀국 파문에 이르기까지 경계인들의 심리를 어슴푸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선생님과 나는 그분들 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최정규 선생은 뒤늦게 1970년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전태일을 알았다. 그때부터 동료들과 뜻을 모아 한국으로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최정규 선생은 "독일 TV로 방영된 광주항쟁 뉴스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지인들이 부르면 만사 제치고 달려온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취중 발언에서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조직에 관여하면서 겪은 쓰라림도 이따금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늘 웃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곁에는 벗들이 많았다.
 
2010년 독일 보쿰에서 독일 교민들과 함께 송년회.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 최정규 선생님, 맨오른쪽이 글쓴이다.
 2010년 독일 보쿰에서 독일 교민들과 함께 송년회.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고 최정규 선생님, 맨오른쪽이 글쓴이다.
ⓒ 육성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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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사에서 '진보의 미래'를 걱정하다

선생님이 귀정사에서 사회연대쉼터를 만들던 시절, 나는 지리산 자락을 지날 때 들러가곤 했다. 남원 터미널에서 전화를 걸면 선생님은 예외 없이 막걸리를 사 오라고 했다. 막걸리에 대한 그의 식견은 상당해서 어지간한 동네의 상표를 줄줄이 외웠다. 한번은 SNS에 '전국 막걸리 번개'를 올렸다가 취소한 일도 있었다.

나는 막걸리를 살 때마다 '과연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정이 되기 전 술은 어김없이 다 떨어졌다. 내가 만든 계란말이와 두부김치를 맛나게 드시며 '진보의 미래'를 걱정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봄철이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땅을 파고, 가을엔 선생님이 거둔 곡물을 사서 지인들과 나누었다. 선생님은 당연한 값을 받으면서도 늘 미안해하셨다.
 
귀정사에 있는 사회연대쉼터.
 귀정사에 있는 사회연대쉼터.
ⓒ 육성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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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쉼터가 문을 열기 직전이었을 게다. 선생님은 '쉼터의 기억'에 관한 딱 두 문단의 글을 보내 달라고 하셨다. 내가 그때 왜 글의 제목을 '이승의 인연은 모두 소중하다'고 달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선생님은 내 글을 받고 알 듯 모를 듯한 답신을 주셨다. 이제 다시 선생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이 귀정사 뒷산에서 감을 따고 계실 것만 같다.

귀정사에 들어서자마자 쉼터지기는 감을 따라며 대나무 장대를 주었다. 폭설에 무슨 감이 있을까 싶었는데 칡넝쿨을 헤치자 포도송이처럼 홍시가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감은 해마다 새로 자란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지라 나무를 잘 부러뜨리는 게 기술이다. 선생님은 노련한 솜씨로, 나는 투박한 힘으로 가지를 꺾었다. 절반은 막 길을 떠나는 시인에게, 나머지는 절을 지키는 처사님께 드렸다.

축구로 치면 전반전 45분 종료. 그해 겨울, 나는 나이 마흔 다섯에 브레이크를 걸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다녔다. 귀정사는 '설국열차'처럼 하염없이 흘러가던 하프타임의 시작과 끝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후반전 휘슬을 들었다. 새벽녘 법당으로 스며드는 안개와 저녁 무렵 만행산 너머로 물드는 노을의 영감을 잊지 못한다. 내가 묵었던 선방, '연분'과 '정분'에서 나는 이승의 인연이 모두 소중함을 깨달았다. 
 
사회연대쉼터가 있는 귀정사에서 감을 따고 있는 고 최정규 선생님
 사회연대쉼터가 있는 귀정사에서 감을 따고 있는 고 최정규 선생님
ⓒ 육성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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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추모글을 쓴 육성철 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은 <일요신문>과 월간 <신동아> 기자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실 행정관 등을 지냈다. <왜 클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 <세상을 향해 어퍼컷>, <동대문 네팔타운의 희노애락> 등을 썼다.


태그:#최정규, #사회연대쉼터, #독일 보쿰, #귀정사, #육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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