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마침내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날이 밝았다.

우리는 손에 작은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연화지(롄화츠·蓮花池) 38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힘차게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로 시작하는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임시정부 청사 앞에 당도했다. 연화지라고 쓰인 표지판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여덟 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화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연화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입구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연화지 청사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뒤 입주한 네 번째 청사이자 마지막 청사다. 그전에 쓰던 청사들은 모두 철거되어, 이제는 연화지 청사가 충칭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사가 됐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바로 이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사실 나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7년 전이었던 2013년 여름, 광복군 장준하 선생의 발자취를 좇는 대학생 해외탐방 프로그램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 리> 탐방단원의 일원으로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돌베개>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장준하 선생님은 청사 위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고 온몸이 굳었다고 했다. 그것은 기쁨, 서글픔, 노여움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당신도 모르게 나타난 몸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나는 청사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며 그 당시 장준하 선생님의 감정을 느끼려 노력했고, '부정시림 국민한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처럼 청사 위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지는 않았다. 태극기가 걸려서 휘날리고 있었더라면 정말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꼈을 것 같은데 그 점이 참 아쉬웠다. 그래도 꿈에도 그리던 임정 청사에 도착한 나의 심정은 마치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청사에 입성한 우리는 그곳에서 68년 전(1945년) 장준하 선생님이 그랬듯이 당시의 환영행사를 재연하고 정식 청년등불이자 광복군이 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당시 장준하 선생님과 동지들이 도착했을 때,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신 지청천 장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신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장 선생님과 동지들을 환영하며 '왜놈의 폭정 밑에서 모두가 왜놈이 된 줄 알고 염려하였더니 그것이 나의 한낱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국의 숭엄한 혼이 살아있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는 감동적인 격려사를 하신다. 

 
 일본군 부대를 탈출, 6천 리 장정 끝에 충칭 연화지 청사에 도착해 광복군이 된 학병들 (좌로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일본군 부대를 탈출, 6천 리 장정 끝에 충칭 연화지 청사에 도착해 광복군이 된 학병들 (좌로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청사 앞뜰에 도열해 서서 힘차게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이때 부른 애국가는 올드랭사인 곡조가 아닌 지금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였다. 그리고 마침내 '예비등불'에서 예비를 빼고 제26기 청년등불이자 광복군이 되었다. 어렵게 얻은 등불이라는 이름. 임시정부에 도착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등불이라는 이름. 그렇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었다." - 2013년 여름, 제26차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 리> 당시 충칭 연화지 청사를 방문한 뒤 노트에 남겼던 기록
 
 2013년 여름 그리고 2020년 겨울
 2013년 여름 그리고 2020년 겨울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은 듯한' 감격은 변함이 없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면 리모델링을 한 탓에, 전시실의 구성은 그때와 비교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복원된 국무회의실
 복원된 국무회의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백범 김구 주석 판공실(집무실)
 백범 김구 주석 판공실(집무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백범의 계단', 탄생의 비밀

연화지 청사에는 국무회의실을 비롯하여 김구 선생 집무실, 차리석 선생 집무실 등 각 요인들의 집무실이 모두 복원되어 있다. 단연 인기 있는 장소는 연화지 청사의 상징과도 같은 '백범의 계단'이다.
 
 충칭 연화지 청사 '백범의 계단'
 충칭 연화지 청사 "백범의 계단"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백범의 계단이라는 명칭은 바로 작년에 출간된 <임정로드 4000km>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단어다. 옆자리에서 열심히 이 책을 편집하던 동료 편집자가 '괜찮은 이름 없을까?' 고민하다가 직접 명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백범의 계단에 서게끔 유도할 수 있는 카피가 없을까?' 그렇게 탄생한 카피가 바로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라"였다.

그렇게 책이 출간된 이후, 연화지 청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꼭 이 계단에 서서 인증샷을 찍은 뒤 SNS 인증샷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책을 만든 이들이 바랐던 대로, 많은 시민들이 임정로드를 걸었고, 그들 모두가 종착지인 백범의 계단에 서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것으로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전통을 만들어나간 것이다.

김구의 계단이 아닌 백정범부의 계단

그런데 백범의 계단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면서, 일부 독자들로부터 백범의 계단이라는 이름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임시정부는 백범 김구 선생 혼자서 이끈 정부도 아니었는데, 마치 김구 선생 혼자 독립운동을 한 것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나는 백범이라는 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백범(白凡).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백정범부(白丁凡夫)의 줄임말이다. 김구 선생은 백범이라는 호를 짓게 된 계기에 대해 "이 땅의 백정범부 누구나 나만큼의 애국심을 갖는다면 완전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겠다"라는 바람을 가지고 지었노라 밝힌 바 있다. 즉, 이 땅의 모든 국민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애국자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지은 호인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흉상 (충칭 연화지 청사 전시실)
 백범 김구 선생 흉상 (충칭 연화지 청사 전시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고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백범의 계단은 김구의 계단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지키고 이끌고 온 백정범부들의 계단이라고. 더 나아가 앞으로 이 계단에서 설 모든 이들,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미래 백정범부들의 계단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자!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역시 백범의 계단에 서서 힘차게 '만세!'를 올렸다. 김구 선생은 우리 손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통일을 맞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굳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활짝 웃었다. 앞으로 분명 더 좋은 나라가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충칭 연화지 청사 '백범의 계단'에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충칭 연화지 청사 "백범의 계단"에 선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 변량근

관련사진보기

우리가 임정로드를 계속 걸어야만 하는 이유

연화지 청사 탐방을 끝으로 5박 6일간의 대장정도 마침표를 찍었다. 짧은 시간 역사적인 여정을 함께 했던 답사단원들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장거리 여행을 한 번 다녀오면, 이렇게 돌아와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진다. 소소하지만 늘 잊고 살아가는 행복이다. 임정로드를 걷고 오니, 이렇게 돌아올 수 있는 내 나라, 내 땅, 내 집을 찾아준 독립운동가들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됐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없었다. 중국 땅 어디에도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늘 적의 공습이 기다리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망국노(亡國奴)'라며 조롱했다. 그들은 얼마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마침내 해방을 맞아 토교촌을 떠날 때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비록 우리 손으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이었기에, 마음이 무거웠겠지만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충칭 연화지 청사 전시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충칭 연화지 청사 전시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돌아온 조국은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애국자로 둔갑한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하며 다시 이 땅을 떠나야만 했다.

그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인 현충원에서 가장 양지 바른 곳에 잠든 친일파들은 그 아래 잠든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다. 친일파들의 묘를 정부가 나서서 '파묘'하지도 못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영혼마저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임정로드를 계속 걸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의 역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 길을 걷다 보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임정로드 순례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가 잠든 묘역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친일파가 잠든 묘역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 김종훈

관련사진보기

에필로그: 임정로드, 다시 걷게 될 그날을 기약하며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코로나의 여파로 예정되어 있던 임정로드 탐방 역시 모두 중단됐다. 지금 상하이와 충칭 등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들 역시 모두 문을 닫은 상태라고 한다.

'다시 걷는 임정로드' 시리즈를 연재하면서도 고민이 많았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지금, 이 글을 연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언젠가 다시 이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마음 한뜻으로 국가적 재난을 극복할 '연대'의 정신을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꿋꿋하게 연재를 이어왔다.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 19 사태가 하루 빨리 종식되어, 다시 임정로드 순례길이 열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지금까지 연재를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애국선열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학도 / 以茶靜心 以武健身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