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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용기야  I got yo back"
- 슬릭 <MA GIRLS> (2017)

래퍼 슬릭의 <마 걸스>(MA GIRLS)를 들으면 멀리 있는 용기를 바로 옆에서 듣는 기분이다. 지난 11월 16일 재즈 피아니스트 남메아리와 슬릭으로 구성된 '남메아리 밴드' 1집 발매 공연에서 들은 '마 걸스' 밴드 버전에 대한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같은 달 21일, 이태원에서 슬릭을 만났다. 슬릭의 용기를 공연이 아닌 실제 대화를 통해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멋있는 순간보다 멋있지 않은 순간이 더 많잖아요."

슬릭은 인생의 신념을 딱히 정해놓지 않는다고 했다. 인생에서 매력적으로 느끼는 가치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의 각성이나 깨달음이 평생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생에서 무엇이 옳은 건지, 왜 옳은 건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더 재미있고 스스로를 반성하게 해요."

옳은 신념을 정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인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신념을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멋진' 모습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한다.
  
"래퍼면 랩이나 하지 무슨 사회문제에 관해 얘기하냐는 입장도 있는데 일단 예술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음악을 만들려는 사람이라면 음악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죠."

확고한 신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슬릭에게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는 음악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야 하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당사자성'을 이야기한다. 당사자가 아닌 문제에도 당사자처럼 문제를 체득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배제되면, 무조건 관찰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만들게 되므로 생산적이지 않다고 단언한다.
       
슬릭은 스스로 '하루아침에'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말한다. 2015년 메르스 사태로 처음 페미니즘 이슈를 접했고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을 통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렇게 본인이 당사자임을 인지하고, 당사자성을 체득하게 됐다. 이후 평범한 음악 페스티벌보다 주로 페미니즘이나 인권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남성 중심 서사의 한국 힙합을 비판하면서 본인은 랩을 하는 것이지, 국내 힙합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슬릭에게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라고 부른다.
  
개인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
 
 남메아리밴드 1집발매 기념공연 'Your Blues'에서 노래하는 래퍼 슬릭.
 남메아리밴드 1집발매 기념공연 "Your Blues"에서 노래하는 래퍼 슬릭.
ⓒ 김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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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은 지난해 래퍼 산이와 디스전 당시 <EQUALIST>라는 곡을 발매했을 때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파급력이 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그러나 가수 김사월씨로부터 "(음원) 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정말 잘한 일이구나'라고 느꼈다.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본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히려 본인이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슬릭에겐 음악이 답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변화의 포인트 또한 '음악'이었다. 그는 인류의 구원보다 당장 나의 구원 그리고 내 주변 개개인의 구원을 먼저 생각했다. 인류를 구원하는 '캡틴 마블'과 달리 우리는 캡틴 마블이 될 수 없기에 '나'의 구원에 조금 더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슬릭은 여러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을 접하고 '공감의 부재'를 크게 느낄 때, 좌절과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말한다. 

"내 두려움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그냥 안 두려운 '척'을 했어요."

페미니스트 선언 후 두려운 순간이 많았다. 페미니스트 래퍼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두려움이 두려움으로 인지되는 순간들을 고찰했다.

"무언가를 망설이게 될 때, 즉 '지금 이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느낄 때 가장 곤란함을 겪어요. 용기라는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기자님이 말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라는 말은 그저 예쁜 말이에요. 용기를 통해 두려움을 이겨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두려움을 뒤로 미룰 뿐이죠. 그러다 보면 두려움의 존재를 잊어버리기도 해요."
 

무조건적인 행복이나 용기는 신화이고 영화 소재일 뿐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허울뿐인 극복의 관점에서 벗어나 좀 더 진실된 내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슬릭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여러 번 상기시키면서, 본인의 완전한 모습보다 계속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모습을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인터뷰 중 (왼쪽 래퍼슬릭)
 인터뷰 중 (왼쪽 래퍼슬릭)
ⓒ 김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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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결국엔 나를 좋아할 거고 좋아하지 않는 건 그 사람의 문제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게 필요해요. 저한테 필요하고 모든 여성에게도 필요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필요해요."
 

20대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사랑'이라고 답했다. 에로틱 러브가 아닌 '누구나' 날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본인을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를 싫어해? 다시 생각해봐'가 옳은 것이지 '맞아. 나는 싫어할 만한 존재야'라는 자조적인 확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무 살에는 허접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어요. 어른 그리고 여성으로 봐주기를 원했어요."

지금의 슬릭은 진정한 본인의 모습이 무엇이고 옳은 신념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고 있다. 본인이 허접했다고 말하는 시절과 현재를 비교하며 변화를 찾아가는 자신처럼 많은 여성이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슬릭이 스무 살 때 만든 노래 중 곡 <고마워>를 추천한다. 해당 노래는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들을 수 있다.
 
"한번의 실수가 기대를 저버릴 거란 걱정에 절대로 거만할 수 없어 애써 담담했지. 날 계속 막아 댔던 건 나의 속마음 뿐이었고."
- 슬릭 <고마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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