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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절정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내 가족이 자살을 했다? 남은 가족들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괴로워 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데 만약 자살한 가족이 살아돌아온다면? 일단은 기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묻고 싶어질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공백을 채워라>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온다면?이라는 다소 '진부한' 전제로 시작된다. 주인공 데쓰오는 제관회사에 근무하는 30대 가장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 새로 장만한 '내 집'에서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있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회사에서는 새로 출시 중인 '맥주 캔' 개발을 앞두고 온 에너지를 쏟고 있다. 모함하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전력질주하는 성실한 샐러리맨이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묵지근한 소설 <공백을 채워라>
▲ 히라노 게이치로의 <공백을 채워라>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묵지근한 소설 <공백을 채워라>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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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남편의 환생, 아내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런 데쓰오는 어느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작은 데쓰오가 자살한 지 3년 만에 다시 생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미 네 살이 된 아들은 아빠를 보고 쭈뼛거리고, 아내는 기뻐하면서도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

왜 자신과 아들을 두고, 옥상에서 왜 뛰어내린건지 아내는 알지 못한다. 다시 살아돌아왔으니, 기쁘긴 하지만 그 응어리를 풀 수 없어, 부부는 서먹하다. 남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언제 또 자신을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짓누른다.

데쓰오는 자신이 자살따위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회사 중 자신을 증오했던 한 인물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데쓰오는 자신을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의심이 가는 인물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소설은 '진범'을 찾아내려는 데쓰오의 행적과 시선을 따라 제법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데쓰오는 마침내 알아낸다. 자신의 죽음의 '진범'을.

행복했던(또는 행복해보였던) 30대 남성, 데쓰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사실 그 조차도 모르는 것이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한다는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책무, 직장에서도 인정받아야 된다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으로 데쓰오는 자신을 극단까지 몰아간다.

데쓰오는 자신이 살아있던 당시에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진범'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인생 선배이자, 이웃인 아키요시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 피로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 번뿐인 인생, 한 번 뿐인 삼심대를 결코 헛되이 보내고 있지 않다는... 아키요시씨도 말씀하셨듯이 이렇게 지칠 때까지 일한 나는 당당히 가슴을 펴고 행복해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 이 시대에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돈도 운도 아닌 피로로 손에 넣은 것이 아닐까. 저는 행복했어요. 그리고 그만큼 지쳤습니다.'
- <공백을 채워라> p.471

데쓰오는 피곤하게 살아야만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키요시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그것만이 아니야. 물건을 팔고 직원들을 보살피고 나름대로 세상에 조금 도움을 주고. 물론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또 조금 다르잖아? 유전자가 남지 않더라도 뭔가는 남을 거야. 나머지 시간에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가끔 술 한잔 하고 리쿠(데쓰오의 아들)랑 놀고...그거면 충분해.' - <공백을 채워라> p.475
 
나도 모르는 수많은 '나'

소설 중에는 고흐의 자화상을 비유하며 내 안의 여러 분인(分人)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즉 아내로서의 나, 딸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누나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등등... 여러 관계 속에서의 '나'가 있는데 평소 자신을 괴롭히는 한 '분인'을 다른 분인들이 극단으로 몰고가서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싫어질 때, 내가 극도로 혐오스러울 때, 그때의 나는 내 전부가 아니다. 그런 한 '분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마치 나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의미다.
 
 '지켜보면 되지 않을까? 나의 싫은 모습이 드러날 때, 다른 정상적인 나를 통해 가만히 지켜봐주면 없애려 해도 역시 깊은 곳에서 여러 가지가 뒤엉켜 있을 거야. 아마, 또 절망적인 분인이 생기고.... 분인끼리 지켜본다, 분명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 <공백을 채워라> p.481
 
소설 속에서는 데쓰오 외에도 환생자들이 급격히 증가해 그것이 사회문제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환생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생기는 또 다른 사회문제는 뭐가 있을까? 일자리 복직, 생명보험금 환급, 뒤엉켜 버린 가족관계의 회복, 운전면허 갱신 등등... 물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 돌아온 환생자들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또 사라져버리게 된다. 날짜도 기간도 기약 없다. 아무도 모른다. 눈을 마주치며 웃으며 차를 마시는 도중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손을 잡고 산책하는 때가 될 수도 있고, 말도 안되는 오해로 말싸움을 하고 막 헤어진뒤 '내일은 사과해야지'라고 결심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삶은 오늘 하루뿐이다
 

사실, 환생자 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잖은가. 당장 눈앞을 장담할 수 없으니... 다만 우리는 삶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삶은 오늘 하루뿐이다. 하루하루의 연장일 뿐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절대로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쓰오는 환생한 후,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의 아내도 남편의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되고 의도치 않았던 '오해'를 풀게 된다. 그들은 함께 유원지에 가서 도시락을 먹고, 산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아이를 기다리고, 목욕하고, 소박한 저녁을 먹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데쓰오에겐 시간이 없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하루, 아니 한 시간, 일 분 일 초가 너무 아깝고 절박하다. 삶이란 이런 것인데, 이제 행복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왜 자살을 택했을까. 데쓰오는 후회를 하지만 너무 늦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은 꽤 묵지근하다. 작년 이맘때쯤 읽은 <마티네의 정오>라는 소설은 연애소설인데도, 난민, 글로벌경제, 전쟁 등 꽤 무거운 주제들을 함께 버무렸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 대한 마음 치료, 자살 미수자들의 마음 돌봄, 죽은 이를 기억하기 또는 망각하기의 방법 등 많은 생각과 공부를 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 개인sns에도 올립니다


공백을 채워라

히라노 게이치로 (지은이), 이영미 (옮긴이), 문학동네(2018)


태그:#히라노 게이치로, #공백을 채워라, #자살 , #유가족, #마음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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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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