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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도 한때

그래픽노블
19.11.11 22:08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제목 : 봄꽃도 한 때
작가 : 심흥아, 서윤아, 박문영, 이지나, 노영미

심흥아 작가를 비롯해 여러 명의 작가들이 한국 단편소설을 만화로 재해석한 작품집이다. 이 책의 소개 내용을 보자.

인간의 청춘의 면면들은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반복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자는 것이 이 작품집의 최초의 아이디어이다. 손창섭의 「비오는 날」,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동인의 「배따라기」, 박태원의 「피로」 그리고 윤동주의 「병원」, 현대 문학의 기점이 되었던 이 작품들의 심상을 다섯 명의 만화가들이 현재의 시점에 맞춰 단편 만화로 엮었다.

원작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현대적 시점에서 재해석 한 것이다. 즉 만화 작가의 독창적인 창작과 상상력이 최대한 동원되었다는 뜻이다.
이 작품집의 작가들은 모두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심흥아 작가의 작품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전작인 '우리, 선화'와 '카페 그램' 등에서 보여 준 그림이 주로 펜선 위주였다면, 이 작품에서는 붓선으로 그림의 선을 바꿨다.
붓선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질감은 예전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멋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림이 한층 성숙한 느낌이 들고, 작품을 재해석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역시 담담하면서도 깔끔하고, 차가우면서도 여운이 있는 느낌을 준다.

나는 미혼 여성이고, 직장에 다닌다. 엄마는 전화해서 선을 보라고 재촉하지만, 나는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연립주택 이층에 사는 나는, 비 오는 날, 바로 앞 구멍가게에 생수를 사러 들렀다가 가게를 보는 남자를 본다. 그 남자는 남루하고 굽은 어깨를 하고 있고, 늙은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늘 무언가 노트에 쓰고 있는 남자는 우울해 보인다.
여자는 대기업 다니는 남자를 소개받아 데이트를 하고, 구멍가게 할머니와 친해져 김치도 얻어 먹고, 자연스럽게 우울해 보이는 남자와 인사를 나눈다. 할머니가 혼자 하는 넋두리를 들으며, 남자가 결혼할 생각 없이 글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데이트 한 남자와 자신의 빌라에서 섹스를 한 나는 이사를 하면서 부산으로 간다고 거짓말 한다. 나는 사랑하지는 않지만 조건이 좋은, 소개 받은 남자와 결혼하고, 구멍가게 남자는 그해 겨울이 지나도록 무언가를 쓴다.
우연히 서점에서 구멍가게 남자의 이름이 적힌 소설책을 발견한 나는 오랜만에 구멍가게를 찾아가지만 가게는 비어 있고, 할머니와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이웃도 모른다고 한다. 나는 가게를 떠나면서, 지난 여름, 할머니와 남자와 셋이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수박 먹던 추억을 떠올린다.

손창섭의 단편 '비 오는 날'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 25 당시, 임시 수도 부산에 피난 온 대학생 원구는 친구 동욱의 집에 가 본 뒤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들 남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동욱은 누이동생 동옥과 1. 4 후퇴 때 월남하여 살고 있다. 동욱은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으로 동옥이가 초상화를 그려서 그나마 해결하고 있는 형편이다. 동옥은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로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절고 있다. 동욱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착실한 교인이며 목사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6. 25 전쟁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원구를 처음 만났을 때 적대감을 보이던 동옥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점차 태도가 부드러워진다. 동욱은 원구에게 동옥과 결혼하기를 권유한다. 동욱 남매가 살고 있는 집은 그들의 비참한 생활만큼 황폐한 판잣집이었다. 비가 갠 어느 날 리어카에 잡화를 벌여 놓은 원구에게 동욱이 찾아와서, 통역 장교 모집에 응시하려다 수속이 복잡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며칠 후, 원구가 동욱의 집에 찾아갔으나 동옥은 주인 노파에게 빌려준 돈을 떼여 그녀의 얼굴에서 자조적인 웃음밖엔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며칠 후, 동욱의 집을 찾아간 원구를 맞는 사람은 동욱 남매가 아닌 낯선 사내였다. 그 사내는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이 없고, 세 들어 살던 집마저 주인이 몰래 팔고 도망가고 동옥이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동옥이는 얼굴이 반반하여 어디 가 몸을 판들 굶기야 하겠느냐는 사내의 말소리를 등지며, 원구는 자기가 동옥을 팔아먹었다는 자책감에 빠진다.

원작에서 주인공 원구가 느끼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친구 동욱이 자기 동생 동옥과 결혼하기를 권유했을 때, 원구는 탐탁치 않았다. 동욱과 동옥은 말하자면 '삼팔따라지'였고, 뿌리가 없는 남매와 엮이면, 자신의 처지도 지금 한심한데, 더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동옥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으니, 몸까지 성치 않은 여자와 혼인하는 것은 여러모로 삶이 고단하고 힘들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심흥아의 만화에서 주인공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집앞 구멍가게의 남자는 허우대가 멀쩡하지만 백수로 지내며 희망 없는 글쓰기나 하고 있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며 산다. 허름한 구멍가게는 손님도 적고, 남자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멍가게 남자에게 마음이 있지만, 현실의 삶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이어서, '나'는 소개로 만난 남자와 길게 사귀지도 않고 결혼한다. 그 남자의 '조건'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원구'는 동옥이와 혼인을 할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자가 있거나, 뚜렷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처지도 동욱 남매와 그리 다를 것이 없지만, 원구의 내면에는 동욱 남매를 깔보는 이기심이 있고, 이것이 동옥의 비참한 삶을 떠올리면서 자책감, 죄책감을 만들게 된다.
원작의 '원구'나 심흥아 작가의 작품에서 '나'와 같은 인물을 비난할 수는 없다. 세상은 냉정하고,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지금의 처지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주위 사람의 비판이나 비난에 앞서, 자신의 내면에서 양심의 가책, 죄책감, 부끄러운 감정 등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테니까.
대개의 경우, 자신의 불편한 마음, 죄책감을 외면하고 합리화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괴롭기 때문에,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작의 주인공이나 심흥아의 작품 속 '나'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감수한다.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심흥아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고, 다른 작품들도 나쁘진 않았지만 '형식미'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작가주의 작품들이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형식미'라고 생각하는데, 스토리나 구성, 내용 등이 아무리 좋아도, 그림 자체, 그림이 보여주는 형식성, 그림으로 표현되는 구성, 만화 한 컷, 한 컷이 드러내는 뚜렷한 상징성 등이 부족하다면, 작가주의 작품으로는 격이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봄꽃도 한 때'를 구입한 동기는 심흥아 작가의 작품 때문이었다. 그만큼, 한 작가의 작품성은, 다른 여러 요소들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심흥아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봄꽃도 한때 심흥아 작가 외 네 명의 작가 작품을 모은 '봄꽃도 한때' ⓒ 심흥아 외 네 명
 

덧붙이는 글 | 그래픽노블을 리뷰/평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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