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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0세 된 송달용. 그는 1992년에 스페인 침구협회를 창설해서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1997년에는 세계침구연합회에 가입해서 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한의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 등 침구문화권에서 유학을 한 것도 아니다. 스페인에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 갔다가 인생이 전화된 경우다.

지난 8월 31일 허임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서울 종로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국제한국침구인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한국에 온 송달용 회장을 만나, 그의 인생유전과 침구인생을 들어보았다.

"고향이 충남 유성인데 서울에 올라와 직장 생활을 했어요. 충청도 촌놈이라고 무시하길래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군대에서도 교관 역할을 했구요."
 

지긋한 나이에도 오랫동안 무술을 단련한 풍모는 아직도 남아있다. 힘 있는 눈빛이나 꼿꼿한 자세가 이를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 먼 스페인까지 가게 되었을까?

"친구 삼촌이 독일 광부로 나갔는데 나중에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주했어요. 그분을 통해서 태권도 사범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당시 브루스 리와 영화 '정무문' 영향으로 태권도 인기가 최고였어요. 그래서 지원했고 77년 2월 초청장을 받아서 출국했습니다.

그때는 직항이 없어 일본을 거쳐 알래스카에 가서, 다시 북극해를 넘고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 바르셀로나에 안착했습니다 전부 48시간 이상이 걸리는 과정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언어도, 음식도 달라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런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고 그는 기억한다.

"도착한 체육관은 당시 한국 여느 도장보다 시설이 좋았어요. 남녀 샤워장이 따로 있었고 학생들도 상류계층 손님들, 변호사나 건축가, 회계사 같은 사람이 주였어요. 당시 학생 수가 180명이었는데 나중에 270명까지 늘었고 성심껏 지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빈곤 탈출을 위한 해외 인력송출을 적극 추진했다. 제일 먼저 1963년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였다. 이어서 태권도사범, 병아리 감별사 등 다양한 인력이 진출하였다. 70년대 초반 스페인 본토 내 한인은 70명 내외였고, 그 중 30여 명이 태권도 사범일 정도로 태권도의 해외진출은 활발했다. 송 회장도 바로 이런 때에 스페인에 정착했다. 
 
송달용 회장 칠순이 된 나이지만 오랫동안 무술을 한 사람답게 눈빛이 강렬하고 맑았다.
▲ 송달용 회장 칠순이 된 나이지만 오랫동안 무술을 한 사람답게 눈빛이 강렬하고 맑았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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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궁금해졌다. 일본의 가라데나 중국의 우슈와 현지에서 경쟁은 어땠는지...

"당시 중국은 대외 관계가 폐쇄적이이서 무술인력은 거의 없었어요. 주로 경쟁은 가라데와 맞붙었지요. 때로는 광장에서 태권도와 가라데가 공개시연을 하기도 했구요. 태권도장으로 문닫는 가라데 도장이 많았어요.

제가 운영하는 도장 옆에 있던 가라데 도장도 그렇게 됐는데 우연인지 가라데 도장이 문을 닫고 난 후 우리 도장으로 "폭발물이 설치되었다"는 협박전화가 왔어요. 스페인 경찰이 오고 폭발물 탐지견도 오고 난리를 한번 치렀지요. 태권도 사범은 그 당시에 나라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국위선양을 한 애국자들입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자부심과 긍지가 묻어나는 듯했다. 정작 궁금한 것은 잘 나가던 태권도사범이며 종합체육관까지 운영하던 그가 침구사로 변신한 배경이었다.

"합기도란 무술이 대략 280종 3600가지 기술이라고 해요. 꺾고 혈을 누르고 손목을 잡으며 곡지를 누른달지 천도나 대추혈을 공격한달지 하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또 친구 아버님이 한의원을 하셨는데 거기서도 배우고 운동선배들에게서도 영구팔법등 다양하게 배워서 간단한 지식은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한국에 나와서 침술교류를 한다.
 그는 자주 한국에 나와서 침술교류를 한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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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설명은 이해가 되었다. 무술사범들이 간단한 응급처치나 침에 대한 지식들은 있는 편이니까. 의문은 어떻게 침구사로 변신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우리 도장이 인기가 좋아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운동 중에 발목이나 허리 염좌 등 다치는 환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익혔던 지식을 가지고 침을 놓아주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의 태권도나 침술에 대한 호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효과가 있었어요 예후들도 좋았구요. 그래서 소문이 났고 침만 맞으러 사람들이 도장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도장과 침술원을 병행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침술원만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침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이런 부분에 애로가 있었을 같은데 그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점이 문제였어요. 그런데 1997년 한국에서 김남수 선생이 오셔서 수평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때 시험 준비를 하면서 어느 정도의 이론적 기초를 닦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침술원을 운영하면서 한국에 수시로 들어와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많이 했고 저 스스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침술원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92년에 스페인 침구협회를 창설해서 회장을 맡고 있는 이력은 좀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한국인이 스페인에서 협회회장을 맡고 있는 걸까?

"사실, 스페인에 다양한 침구협회가 있어요. 중국에서 요즘은 국가정책적으로 중의사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제가 창설한 협회는 한인침구사 중심이구요. 스페인이 대체의학에 대해선 호의적인데 침구사제도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사지나 침뜸 요법을 전문직역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송달용 회장 말고도 스페인 내에서 한인 침구사들 활동을 어떠할까? 그들 위상도 송 회장과 비슷한지 물어봤다.

"침구사들은 비교적 일찍 스페인에 정착한 그룹입니다. 침구사들은 대부분 그 지역의 유지들이죠. 카나리아제도의 떼네리훼의 경우 그 지역에서 침구원을 하는 신현승 선생의 공적을 기려 스페인 정부가 그 동네 공원을 '한국공원'이라고 명명했어요.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봉사활동 등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메달도 주었구요.

또 스페인 북부의 최대도시인 빌바오에서는 그 지역 주지사가 한국의 침술원에 다니며 침술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주지사의 위치는 한국과 달리 대단합니다. 의전과 격식을 매우 중시하는 그런 분이 침술원을 찾는 것 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명상에 잠겨있는 송달용 회장 그는 틈틈히 명상하면서 성찰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 명상에 잠겨있는 송달용 회장 그는 틈틈히 명상하면서 성찰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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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얘기를 듣다보니 태권도사범 못지 않게 침구사들도 오늘날로 말하면 '한류'를 전 세계에 보급한 원조그룹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한인 침구사들의 위상이 계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증이 일었다.

"저는 지금 침구원과 함께 침구교육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생은 주로 의사나 직장인, 그리고 침구원 운영을 목표로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생이 과정 당 많게는 30여명 적게는 10명 정도입니다. 1, 2학년 때는 이론중심의 교육을 하고 3학년이 되면 실습 중심으로 운영하죠. 강의는 매주 토요일 5~8시간 정도로 운영합니다.

교재도 제가 스페인어로 만드는 중입니다. 이렇게라도 우리 침을 보급하고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죠. 다행히 이미 중국 침을 배우고 온 분들도 한국 침이 최고라고 극찬합니다.


국가가 침구인력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면 동남아나 중남미, 아프리카 등 다양한 곳에 한국침술이라는 한류를 내세워 최소 수만의 고급 인력이 진출할 수 있으니 정부가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페인에 돌아간 후 송달용 회장이 가장 역점을 두고자 하는 일은 한국침구이론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전문적인 의학서적을 남의 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얘기를 덧붙혔다.

"스페인에서도 인정을 합니다만, 한중일 3국 중에 우리 침의 효과가 가장 탁월하다고 호평을 받습니다. 이렇게 좋은 우리 침이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중국은 정책적으로 중의를 진출시키고 최근에는 바르셀로나에 '중의대학'을 설립하려고까지 합니다.

우리 전통인 침구 인력을 많이 양성해서 해외에 파견하면 일자리 문제도 해결되고 한류의 폭도 단지 K팝에 머무르지 않고 좋을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70이 넘어 눈이 어두운데도 제가 번역작업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한국침구가 우수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일념입니다."
 

힘주어 말하는 그의 눈이 반짝인다. 걸그룹도 비보이도 아닌 노구의 나이에 이른 그가 이제 한국침구를 유럽에 뿌리내리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의 바람이 꼭 이뤄지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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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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