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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3‧1운동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시위에 멈추지 않고 근대 사회를 여는 여러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진주에서 일어난 사회운동은 조선의 전통 사회에 있던 폐습을 없애고 평등하고 공정한 근대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김중섭 (사)진주문화연구소 이사장이 27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3‧1운동과 역사도시 진주"라는 발제를 통해 이같이 설명했다. 이날 진주문화연구소는 "진주 3‧1운동의 역사적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김 이사장은 진주 3‧1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린이, 여성, 백정, 소작인 같이 억압받고 부당하게 대우받던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식하여 그들에게 가하던 불공정하고 부당한 사회 관습이나 제도의 폐습을 타파하려고 하였다"고 했다.

이어 "이것은 3·1운동의 유산이기도 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진주 사람들의 의지이기도 하다"며 "이러한 사회 개혁 활동에 진주 사람들은 주체적 행위자로 함께 참여하고 연대하였다. 그들은 지역의 사회적 환경을 바꾸기 위하여 다양한 단체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지역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이사장은 "진주는 근대 사회를 여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었다. 그들이 참여하고 활동한 3·1운동과 그 이후의 사회운동이 벌어진 시기를 '사회운동의 시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아쉽게도 진주의 역사적 경험이 시민사회의 발전이나 시민의식의 성장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한 한계의 요인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며 "그러나 무엇보다 식민지 지배라는 시대 상황에서 생기는 사회적 여건이 제일 크게 작용하였다"고 덧붙였다.

일제 탄압과 관련해, 그는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과 교활한 간계로 주민들이 주축이 되는 사회운동은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그들의 활동은 항상 감시당하고 억압당하였다"며 "그런 상황에서 시민의식의 확산이나 시민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김중섭 이사장은 "3·1운동과 그 이후의 사회운동을 통하여 진주는 근대사회로 나아가고자 선구적인 역사도시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며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과 형평운동, 농민‧노동운동, 어린이운동 등의 역사는 진주는 역사도시로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 사항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사)진주문화연구소는 9월 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진주 3.1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열었다.
 (사)진주문화연구소는 9월 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진주 3.1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열었다.
ⓒ 진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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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주 한국국제대학교 교수(교양학부)는 "진주 3·1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이란 발제를 통해 "1920년대 진주지역의 대중사회운동은 청년단체들이 선도했고, 핵심단체는 '진주청년회'였다"고 했다.

당시 진주청년회는 '진주사회의 개조(改造)'와 '수양(修養)'을 강조하며 문화계몽운동을 추진했고, 진주의 청년운동은 중앙의 정세와 지역 현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행되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진주청년회가 1921년 4월 단행한 위원제로의 조직변경은 군 단위에서도 신속한 사례였다. 사회주의 이념도 속도감 있게 수용했고, 1925년 사회주의 청년조직들이 출현했다"며 "이들을 통합하여 1928년 1월 진주청년동맹이 결성됨으로 청년운동의 방향전환이 완결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주청년동맹은 통일적 청년운동을 전개하고, 선전·교양활동을 추진했으며 주민의 일상이익 옹호에도 충실했다"며 "이 단체의 사상과 성향에 주목한 당국의 압력도 가중되었다. 1929년부터 집중된 경찰의 탄압은 1930년 후반에 오면 일상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점에 이르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김 교수는 "1931년 진주농민조합 청년부가 진주청년동맹을 흡수함에 따라 대중사회운동으로서의 청년운동은 종료되었다"며 "진주지역의 청년운동은 선도적이고 모범적이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청년운동이 배출한 인적 자원과 행동노선은 진주지역 사회운동의 기반이었다"고 했다.

진주지역 청년 활동과 관련해 그는 "제국주의 압제와 착취, 계급과 빈부의 격차가 없는 낙원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1920년대 진주사회를 풍미했다"며 "그 핵심이 청년, 노동, 농민운동이었다. 일제의 탄압은 물론 후자에 집중되었다"고 했다.

이어 성패의 여부를 떠나 그들이 진주 땅에서 추구했던 가치와 열망, 그리고 희생은 100주년을 맞은 지금 다시 되새겨 볼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였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어린이와 여성을 중심으로 "진주 3·1운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소년운동은 3‧1운동 이후 실천적인 활동으로 전환되는 계기였다. 이전은 주로 잡지 발간 등 계몽적인 측면에 치중하였다. 소년‧소년한반도‧청년‧붉은저고리‧아이들보이‧새별 등은 주요한 잡지였다"며 "'어린이'라는 개념의 보편적인 사용과 어린이날 제정은 소년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근우회 진주지회'에 대해 설명한 그는 "한국여성운동은 보편적 세계여성운동과 연계되어야 하되, 한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여성운동의 성격과 임무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며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분열정신을 극복하고 협동정신으로 공고한 단결을 여성의 의무라고 규정하였다"고 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조미음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진주 3‧1운동과 형평운동의 전국적 전개)와 박용국 남명학연구원 연구위원(진주 3·1운동의 영향과 성과에 관한 논평)에 대해 발제했다.
 
 (사)진주문화연구소는 9월 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진주 3.1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열었다.
 (사)진주문화연구소는 9월 일 오후 진주교육지원청 강당에서 "진주 3.1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열었다.
ⓒ 진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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