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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 싱가포르
 세계에서 제일 비싼 도시 싱가포르
ⓒ The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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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기로 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2019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보고서)이자, 집값 비싸기로 세계 5위(2018 영국 부동산 컨설팅 업체 나이트 프랭크가 발표한 '2018 부(wealth) 보고서')이다.

그런 곳에서 집을 산다고 하니 다들 싱가포르 이주노동자 생활 14년 만에 많은 돈을 벌었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두 딸아이 대학 공부 시키느라 통장 잔고는 진작에 바닥을 드러냈고, 월급을 받아도 매달 내는 월세가 부담스러운 지경이 되어 방법을 찾아야 할 상황이 됐다.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돈이 없으면서도 집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돈이 없이도 집을 살 수 있는 싱가포르의 서민주택 정책에 대한 이야기다. 2018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회담이 열린 탓에 한국에도 싱가포르가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적도의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에 대해 모르는 이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의 상징 멀라이언과 그 주변의 금융가 모습.
 싱가포르의 상징 멀라이언과 그 주변의 금융가 모습.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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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부근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나라 크기는 서울과 부천을 더한 정도의 크기. 그래서 각종 통계를 잡을 땐 나라로 구분하기도 하고, 도시로 구분하기도 한다. 인구는 500만 명 조금 넘는데 실제 싱가포르 국민(이하 "시티즌")은 300만 명 정도이고, 나머지 200만 명은 나처럼 영주권을 받고 사는 외국인과 체류 비자를 받아 사는 외국인을 포함한 수다.

중국계가 70%, 말레이계가 10%, 인도계가 5%, 나머지가 5% 정도로 다민족 국가인데,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게 집을 구할 때도 고려해야 할 조건 중 하나가 된다. 물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비싼 나라인데, 특히 집, 차, 담배, 술이 비싸다.
 
평범한 SUV 차 한 대 가격이 우리 돈으로 8000만원 정도. 여기에 세금을 딱 차 값만큼 더 내야 차를 굴릴 수 있다.
 평범한 SUV 차 한 대 가격이 우리 돈으로 8000만원 정도. 여기에 세금을 딱 차 값만큼 더 내야 차를 굴릴 수 있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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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단위는 싱가포르 달러를 쓰는데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던 1965년에는 싱가포르 달러와 말레이시아 링깃의 화폐가치가 1:1로 동일했었는데 지금은 1:3으로 세 배 정도로 가치가 높아졌다. 14년 전 내가 싱가포르에 올 때 1달러는 600원이었고, 지금은 800원대로 높아졌다.

싱가포르에 온 이후 줄곧 내 집이 없는 나는 월세를 내며 살았다. 월세 계약은 보통 2년을 기준으로 이뤄지는데, 두 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내고 매 달 정해진 월세를 낸다. 계약을 마치고 이사를 갈 땐 당연히 보증금 말곤 돌려 받을 수 있는 게 없다.

지금까지 방 두 개짜리 콘도에 살면서 내가 낸 월세는 약 200만 원이다(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에서 물가가 제일 비싼 도시라는 걸). 액수만 보면 한국 강남 어디쯤에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것처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내가 살고 있던 곳은 도심에서 꽤 많이 떨어져 있고, 서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 정도 월세라면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끼기는 하겠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보통의 서민들이 평균적으로 내는 금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한국일보>는 <'싱가포르 이민 노크' 부자들이 줄섰다>라는 기사에서 싱가포르 "월세는 방 3개 기준으로 350만~650만 원이다"라고 썼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고급 주택가 지역은 그 정도 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벌어도 월세 내고, 공과금 내고, 애들 학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지는 거다.

월세를 내지 않으려면 집을 사는 수밖에 없다. 집을 사기 전에 싱가포르에는 어떤 형태의 집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외국인이면서 영주권자인 내가 살 수 있는 집과 살 수 없는 집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주거 형태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단독주택 혹은 테라스 하우스라고 불리는 연립주택, 하지만 이건 시티즌만 사고 팔 수 있다. 그리고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가 많지 않고 가격도 비싸다.

두 번째는 민간이 지은 아파트(이하 "콘도"). 대부분의 콘도는 단지별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사설 경비원이 따로 있으며, 내부에 수영장과 테니스장, BBQ 시설, 헬스장 등이 갖춰져 있다. 시설이 좋은 만큼 비싸다. 이건 국적과 상관없이 누구나 사고 팔 수가 있다.
 
수영장이 딸린 평범한 콘도의 모습. 여기서 월세를 내며 3년을 살았다.
 수영장이 딸린 평범한 콘도의 모습. 여기서 월세를 내며 3년을 살았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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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대부분의 시티즌이 살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태, 공공아파트(이하 "HDB")가 되겠다. HDB는 "Housing and Development Board(주택개발기구)"의 약자로 우리나라로 치면 "주택공사" 정도 되겠다. 주택개발기구 HDB가 지은 공공아파트를 다들 HDB라고 부른다.

민간주택이나 콘도에 비해 가격이 싸고, 정부가 HDB를 중심으로 대중교통이나 관공서, 공원 등 생활기반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서민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애초에 부동산 투기를 막고 모든 서민 가구에 집을 골고루 분배하는 걸 목적으로 만든 HDB라 HDB 구매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싱가포르의 흔한 HDB 단지.
 싱가포르의 흔한 HDB 단지.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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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B를 구입하는 방법은 새로 짓는 걸 분양 받거나, 분양된 후 5년이 지난 걸 재구매(Resale) 하는 것 두 가지인데, 일단 새로 분양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21세 이상의 시티즌이어야 하고, 수입이 정부가 정한 소득 상한선 이하여야 하며, 자기 소유의 다른 집이 있어서도 안 된다.

신혼 부부나 생애 최초로 집을 구입하는 이에게는 우선권과 할인 혜택을 주고, 부모의 집과 동일한 구역에서 분양을 받을 경우 추가 할인 혜택이 있다. 대신 평생 두 번까지만 HDB 분양의 기회가 있고, 분양 받은 후 5년 이내에 집을 팔 때는 HDB가 정한 금액으로 HDB에 되팔아야 한다. 다민족국가인 싱가포르는 같은 HDB에 민족별로 분양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을 정해서 여러 민족이 섞여 살 수 있도록 했다.

HDB 재구매의 경우는 영주권자도 가능하지만 영주권 받은 지 3년이 지나야 하고, 소득 상한선이 있고, 다른 집이 있어서는 안 된다.

HDB를 샀다고 해서 온전히 내 집이 되는 건 아니다. 싱가포르는 아파트를 분양해도 땅은 정부 소유이기 때문에 정부 소유의 땅에 지은 집을 99년 혹은 999년에 걸쳐 장기 임대하는 형식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집의 소유권이 정부로 다시 넘어가기 때문에 HDB를 살 때는 남은 임대 기간이 얼마인지에 따라 가격이 많이 달라진다.

싱가포르에서 HDB는 사유재산이라기보다는 정부가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내 놓은 공공재이며, 실제로 싱가포르 국민의 82%가 HDB에서 산다.

영주권 받은 지 3년이 넘었고, 소득 상한선은 내 위치에선 보이지도 않고, 내 이름으로 된 집은 애초에 없었으며, 싱가포르에서 집을 샀다고 하더라도 99년 이상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아서 일단 소유권 반환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고 재구매 가능한 HDB를 사기로 결정했다.

일단 부동산 거래가 이뤄지는 사이트에서 맘에 드는 HDB를 고르고 해당 부동산 중개인과 연락해서 집을 보는 것으로 집을 사는 첫 여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과정은 주택개발기구에서 정해 놓은 순서와 규칙대로 진행된다.

주택개발기구 홈페이지에는 해당 단지의 실제 거래 가격이 올라와 있고,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기 전에 해당 HDB의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 "Valuation"을 확인하는데, 거래 전에 미리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에 터무니 없이 바가지를 쓸 일은 없다.

사려는 HDB를 정했으면 우선 주택개발기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집을 사겠다는 의향을 입력하고, 집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확인을 받고, 관련 서류를 입력해야 한다. 그리고 세금과 대금 납입까지 모두 주택개발기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HDB 구매 절차는 모두 9단계로 HDB 홈페이지에 모든 과정을 등록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HDB 구매 절차는 모두 9단계로 HDB 홈페이지에 모든 과정을 등록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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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보고 정하는 과정은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진행을 하지만, 주택개발기구에 서류를 제출하고 소유권을 이전받는 과정은 별도의 부동산 변호사와 계약해서 그를 통해 진행해야 한다. 자격과 서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이 모든 과정을 마칠 때까지 보통 3개월이 소요된다.

이제 집값 비싼 싱가포르에서 어떻게 돈 없이 집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순서가 됐다. 쉽게 이해가 가능하도록 예를 들어 집값이 4억 원이라고 하자. 그럼 그 금액의 75%인 3억 원까지 은행에서 대출해 준다. 이자는 기준금리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2019년 현재 내 기준으로 2.3%였다. 대출 기간은 최대 25년이고, 나이가 많으면 65세까지 계산해서 기간이 줄어 든다.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25%인 1억 원이 필요하고, 슬프게도 내겐 그 돈이 없다. 대신 비장의 카드로 싱가포르의 연금제도인 CPF가 있다. 여기서 CPF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다.
  
CPF 제도에 대한 요약. 적립율이 최대 37%에 이른다.
 CPF 제도에 대한 요약. 적립율이 최대 37%에 이른다.
ⓒ C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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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F는 한국의 국민연금과 그 성격이 비슷한데, 시티즌과 영주권자는 의무 가입을 해야 하며 적립액이 회사 부담과 본인 부담을 합쳐 최대 37%나 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납입 기간과 연령에 따라 납입액과 비율이 조금씩 달라진다).

CPF는 일반계정(ordinary account), 특별계정(special account), 의료계정(medisave account)으로 나뉘어서 적립이 되는데 그 중 일반계정에 적립된 금액을 주택 구입 또는 교육비로 사용 가능하다. 특별계정은 연금으로만 받을 수 있고, 의료계정은 수술 등 고가의 의료비가 필요할 때 사용이 가능하다. 일반계정에 적립된 금액이 충분하다면 HDB를 살 때 대출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물론이고, 대출원금과 이자도 CPF에서 납부가 가능하다.

난 영주권을 받은 지 10년이 넘었고 그동안 적립한 CPF 금액이 HDB 구입을 위한 나머지 25%보다 살짝 많은 수준이라 대출 후 부족한 금액은 모두 CPF로 채워 넣었다. 그러니 집값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물론 실제로 내 돈이 한 푼도 안 들어 간 건 아니다. CPF는 엄연히 내가 넣은 연금이고 집을 팔게 되면 그 금액에 이자까지 더해서 CPF에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집을 사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집값에 따라 1~3% 수준의 세금 (BSD – Buyer's Stamp Duty)을 내야 한다. 거기에 영주권자나 외국인이 싱가포르에서 집을 사기 위해서는 5%의 추가 세금(ABSD – Additional BSD)을 내야 한다. 두 번째 집은 추가 세금이 10%다. 참고로 시티즌이라고 하더라도 집을 보유한 상태에서 두 번째 집을 사려면 7%, 세 번째 집은 10%의 추가 세금을 내야 한다. 부동산 투기를 막고 1가구 1주택 보급을 위한 제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 영주권자인 내가 싱가포르의 서민주택 정책의 혜택을 입어 집값은 은행 대출과 CPF 적립금으로 모두 해결했고, 세금과 부동산 중개인 수수료, 부동산 변호사 수수료만 따로 준비해서 내 집을 살 수 있었다.

이로서 그 동안 남의 집에 살면서 매달 200만 원씩 내던 나는 앞으로는 내 집에서 매달 160만 원의 대출금을 갚으며 살면 되고, 그 중 이자 50만 원를 제외한 나머지는 원금을 갚는 거니까 실제로는 매달 150만 원을 아끼며 내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거다.
  
입주를 마친 내 집(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인가) 거실.
 입주를 마친 내 집(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단어인가) 거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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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이사를 했고, 이제 겨우 집 정리가 끝나 그 동안의 과정을 기사로 쓴다. 나이 오십 다 돼서 드디어 처음으로 내 집이 생겼다.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물가 비싼 나라,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집값이 비싼 나라 싱가포르에.

태그:#싱가포르,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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