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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겨울,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도착한 베를린 중앙역은 허허벌판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사는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곳에 지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신식 중앙역은 참으로 어색했다. 여기가 독일의 수도라고? 몇 번이고 반문하며, 쓸쓸한 베를린 거리에 '유럽 같아 보이는' 고풍스러운 관광지를 찾아 헤매던 것이 내 첫 베를린 여행의 기억이다. 
 
 2009년 베를린 중앙역의 풍경, 어쩜 이리 사람 없이 황량할까
 2009년 베를린 중앙역의 풍경, 어쩜 이리 사람 없이 황량할까
ⓒ 이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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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무지 유럽같은 구석이라곤 없는 후졌던(!) 베를린이 나는 정겨웠다. 콧대 높은 귀족 유럽이 아닌, 어릴 적 살았던 동네 뒷골목의 느낌이랄까. 다만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거기에 고향을 떠나온 다양한 국적의 디아스포라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베를린에 다시 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관광지를 점찍듯 돌며 2009년의 여행을 마쳤다. 그 이후 2010년, 2011년, 2014년에 다시 이끌리듯 베를린으로 왔고, 2017년부터는 좀 더 길게 베를린에 머무는 중이다. 

이렇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베를린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래서 특히 베를린에 관한 책이라면 어떻게든 찾아서 읽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베를린이라는 '맛집'을 남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또는 내가 모르는 베를린의 다른 매력은 또 없는지를 샅샅이 뒤지는 것이 내 여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게 <어느 베를린 달력>이라는 책과 만났다. 
 박소은, 어느 베를린 달력
 박소은, 어느 베를린 달력
ⓒ 정한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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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여성운동, 통일 그리고 베를린 

저자 박소은은 70년대 초반 독일로 유학을 와서 대부분의 시간을 헤센이라는 남서독 지역에서 살아왔다. 40년의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2012년 서울에서 6개월이라는 짧은 귀향 생활에 도전했지만 '나이, 성별, 가족 사항, 출신 지역, 동창, 학력, 인맥, 직장 등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이방인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폐쇄적인 공간'임을 느끼고, 다시 독일행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아왔던 헤센 지역이 아닌 '가난하지만 매혹적인 도시 베를린'에 당도하게 된다. 저자는 70년대부터 독일에서 한국의 유신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모임에 가담하고, 한국 여성 문제를 화두로 하여 <재독 한국 여성 모임> 창립에 기여하였다. 또 6.15 공동선언 이후 유럽지역에서 통일 운동을 이끌었다. 베를린을 읽으러 온 나에게 저자 소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베를린과 한국의 민주화, 여성, 통일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나는 70년대 초반부터 당시 서독에 살면서 베를린을 자주 방문하였다. 동독 아우토반을 지나서 긴 여행 끝에 놓였던 동독 속의 서방 세계 섬, 그런 베를린은 자유라는 개념의 체현, 그 자체였다. 
(중략)
과거와 현재의 교차는 그 속에 사는 한 개인사와 얽혀진다. 그리고 멀리 있는 고향과 이국 생활 속에 혼재하는 기억들과 현실이 또다시 맞물린다. 그러는 가운데 일 년 열두 달의 베를린 그림들이 만들어진다. 어쩌면 베를린을 빙자한 나 자신의 이야기를 매달 쓴 것일지 모른다."

그래, 어쩌면 그래서 나도 자꾸 베를린으로 이끌려 온 것인지 모른다. 베를린을 샅샅이 들여다볼수록 마치 나를 또는 나의 고향 한국(정확히는 분단된 조국)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독일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이자 가장 독일적이지 않은 독일의 도시이다. 동시에 베를린은 수많은 방랑자와 이방인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의 도시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매력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베를린 사람이라고 자처해도 좋다는 의미에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라고 한 케네디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국의 가장 큰 화두였던 민주화, 통일 그리고 여성으로서 저자 자신이 가졌던 문제의식이 베를린이라는 창(窓)을 통해 소개된다. 책에는 통일을 이룬 독일에 대해 부러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의 과정과 그 이후 독일이 갖게 된 문제들은 한국인으로서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의 개인적 일화와 역사가 절묘하게 엮여 들어가는 것이 이 책의 큰 재미이다. 

열두 달 베를린 달력

저자는 40년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갔다가 6개월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온다. 그달이 바로 12월 겨울이었다. 이방인으로 머물기 가장 적합한 곳이 어디일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곳이 베를린이었다. 내가 처음 만났던 2009년 겨울의 쓸쓸한 베를린처럼, 저자에게도 베를린은 '시도 때도 없이 밟게 되는 개똥과의 전쟁, 사방에 버려진 쓰레기들이며 통째로 내다 버린 헌 가구와 가사 도구들'의 모습으로 맞이하였다.

열정적 공산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리는 1월 데모, 베를린 필하모니의 지휘자 아바도가 세상을 떠났던 2월, 관광명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베딩 지역에 자리 잡게 된 3월, 나치 희생자들의 추모공간이 있는 플뢰첸제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11월 9일까지의 기나긴 여정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베를린도 변했다. 
 
"2013년부터 살면서 느낀 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베를린을 2018년의 현실에서 되돌아보니 마치 숙취에서 깨어난 사람의 그 다음 날 아침 모습 같다. (중략) 극우파의 득세와 함께 반(反)이민, 반(反)난민, 반(反)외국인, 반(反)무슬림, 유대인 배척주의 등 각종 반(反)인종주의적인 악취가 스멀스멀 다시 밀려오고 있다. 독일 정치가 오른쪽으로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이 불유쾌함이 베를린의 일상에서 어렴풋이 감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베를린의 매력은 유효할까? 지금 베를린에서 지내는 나에게 늘 떠오르는 질문이다. 나는 왜 여기에 계속 머물고 있을까. 집값은 점점 높아지고, 서울 못지않게 바빠지고, 도시화 되어 가고 있지만, 서울처럼 편하지도 않은 이 도시에 말이다.
 
"베를린의 지하철에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혼재한다. 알 수 없는 언어들 속에 왠지 편안함이 깃든다. (중략) 혼재와 혼란의 와중에서 만끽하는 이 요상한 자유로움. 누구에게도 신경 쓸 필요 없이 활보하게 해주는 이 편안함. 여전히 베를린은 자유라는 화두와 가장 어울리는 도시이다." 

베를린에 살지만 나는 독일 사람이 아니고, 이제 더는 완전한 (?)한국 사람도 아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어마어마한 자유로움이 있다. 그리고 베를린에는 그런 사람들 천지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에게 베를린이 아주 엉망이라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베를린의 열두 달 달력을 저자와 함께 호흡하고 읽어가며, 나는 수년간의 역사를 횡단하고, 수 킬로미터의 베를린 곳곳을 누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어느 베를린 달력>에는 관광명소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골목과 무덤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이 어쩌면 이 맛집에서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 계속해서 오버랩 되는 저자 자신의 개인사가 씨줄, 자연스레 한국의 역사가 날줄이 되어 하나의 직조물이 완성되었다. 

전에 친구와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유년 시절>을 손에 들고, 책에 나온 베를린 곳곳을 탐방했던 적이 있다. 이제는 베를린이 한참 변했으니 <어느 베를린 달력>을 들고, 길을 나설 차례다. 

어느 베를린 달력 - 공감과 낯설음, 그 사이를 잇다

박소은 (지은이), 정한책방(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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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한-독 리서치 네트워크 소나기랩(www.sonagilab.com)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