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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초호마을 정경 마을 뒷동산, 윤철하고택 뒤에서 내려다본 마을 정경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논이 넓게 펼쳐있고 마을과 논 사이에 방풍림이 줄지어 서 있다. 간척사업으로 바다는 멀리 물러나 있다.
▲ 초호마을 정경 마을 뒷동산, 윤철하고택 뒤에서 내려다본 마을 정경이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논이 넓게 펼쳐있고 마을과 논 사이에 방풍림이 줄지어 서 있다. 간척사업으로 바다는 멀리 물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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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1668~1715)는 전주이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22세에 아내와 사별했다. 그 후 완산이씨와 재혼해 7남 2녀를 낳아 모두 9남 3녀를 두었다. 18세에 장남 덕희(1685~1766)를 얻고 세상을 뜨기 1년 전, 47세에 막내 윤덕증(1714~1778)을 보았다. 공재에게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복 외에 다른 복이 있었다면, 그건 자식복이었을 것이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공부해 시·서·화는 물론 경학, 예론, 점, 지리, 의약, 음악에 능통한 재능을 가진 공재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서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남인으로 살았고 수명까지 짧아 끝내 벼슬을 못한 채 세상을 마쳤다. 관운 은 없던 셈이다.

공재의 예술적 감성은 장남 덕희와 덕희의 아들 윤용(1708~1740), 공재의 일곱째아들, 덕현의 장남 윤위(1725~1756)로 이어졌다. 공재의 다섯째 아들, 윤덕렬(1696~1750)의 외손자가 다산 정약용이다. 공재의 실학자로서의 면면이 정약용으로 이어졌다.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문인화가의 계보를 이은 친손과 조선후기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을 외손으로 둔 자식복이야 말로 복 중의 복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자식들이 많다보니 공재의 후손 일부는 해남 땅에 자리 잡았다. 넷째 아들 윤덕훈(1694~1757)의 후손들이 현산면 백포마을에, 일곱째 덕현(1705~1772)의 후손이 초호마을에 뿌리 내렸다.

공재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마을, 초호마을
 
초호마을 정경 세월 따라 돌담은 검어지고 오래돼 보이는 집 몇 채가 영글어 가고 있다.
▲ 초호마을 정경 세월 따라 돌담은 검어지고 오래돼 보이는 집 몇 채가 영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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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호마을은 백포마을 동쪽에 가까이 붙어있다. 백포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백방산과 사이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앞에는 넓은 간척지가 펼쳐있다. 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간척사업이 있기 전 마을 코앞까지 바닷가였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다.

보일 듯 말 듯 논과 마을사이에 조그만 냇물이 흐르고 냇물 따라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나무들이 마을 어귀에서 마을 끝까지 줄지어 서 있다. 물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모두 20여 그루가 바닷바람에 춤추는 듯하다.

마을은 고요하다. 호박꽃 입술 다무는 소리 외에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느리게 세월은 흘러 돌담은 낯빛이 검어지고 오래돼 보이는 흙돌담 집은 여물어가고 있다. 마을동산에 오르자, 백포마을 쪽 산이 희미하게 겹쳐 보이는데 그 모양이 장관이다. 간척지 논은 가마득하고 논에 내몰린 바다는 희끄무레하게 꾸물거린다.

마을 가운데에 기와집 몇 채가 몰려있다. 가운데 솟을대문 집이 천석 부잣집, 윤철하 고택이다. 윤탁(1933년생) 고택으로 불리다가 이 집을 지은 윤철하(1865년생)의 이름을 따서 윤철하 고택으로 불리고 있다. 왼쪽, 오른쪽 모두 윤탁의 친척집으로 서로 쪽문으로 연결돼 있다.

윤철하 고택
 
윤철하고택 사랑채 석축 산자락에 들어선 고택은 경사를 다듬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올렸다. 안채의 석축은 더 높이 쌓아 산중턱에 들어선 산사(山寺)같다.
▲ 윤철하고택 사랑채 석축 산자락에 들어선 고택은 경사를 다듬어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올렸다. 안채의 석축은 더 높이 쌓아 산중턱에 들어선 산사(山寺)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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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하고택 사랑채 사랑채는 우진각지붕 7칸 일자집이다. 마당에 화단을 조성해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여느 사람마당과 달라 낯설어 보인다.
▲ 윤철하고택 사랑채 사랑채는 우진각지붕 7칸 일자집이다. 마당에 화단을 조성해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여느 사람마당과 달라 낯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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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산 아래 완만한 경사를 다듬어 석축을 높이 쌓고 그 위에 사랑채와 안채를 올린 모양이, 사랑채 앞마당에 화단을 만들고 나무와 꽃을 심어 꾸민 것이 낯설다. 조선시대에는 축대와 천장을 높이거나 궁궐에서나 쓸 수 있는 붉은 벽돌, 둥근 기둥을 함부로 쓰지 못하는 '불충(不忠)의 강박'이 지배했고 사랑채 앞마당은 빈 공간으로 놔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낯설게 보인 것이다.

안채는 1906년, 행랑채는 1912년, 별당은 1914년도에 지어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집 규모와 양식의 제한이 없어진 갑오개혁(1894) 이후에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이 집은 세 영역으로 나뉜다. 문간채가 있는 사랑마당과 축대 위의 사랑채 영역, 사랑채지붕 높이의 석축 위에 앉아 있는 안채와 별당채 영역이다.
 
윤철하고택 안채와 별당채  별당채와 안채가 어우러져 ‘ㄷ’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별당채는 원기둥과 화강암 장초석으로 웅장해 보인다.
▲ 윤철하고택 안채와 별당채  별당채와 안채가 어우러져 ‘ㄷ’ 자 모양을 하고 있다. 별당채는 원기둥과 화강암 장초석으로 웅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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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담과 사랑채지붕 높은 곳에 지어진 안채라도 밖에서 잘 보이지 않고 안채마당에서도 밖이 잘 내려다보이지 않는다. 안채 담과 사랑채 골기와 골만 보인다.
▲ 안채담과 사랑채지붕 높은 곳에 지어진 안채라도 밖에서 잘 보이지 않고 안채마당에서도 밖이 잘 내려다보이지 않는다. 안채 담과 사랑채 골기와 골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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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여느 살림집 같지 않고 산중턱에 들어선 한적한 절집 같다. 이집 구조는 돌계단을 올라 사랑채로, 다시 더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안채로 들어가게 돼 있다. 게다가 안채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절집의 문처럼 두툼한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중문은 바로 안채 마당이 보이지 않게 입구와 출구를 다른 방향으로 꺾어 놓았다.

비밀공간처럼 밖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안채와 별당채는 신경을 많이 써서 지었다. 사랑채는 우진각지붕인 반면 안채는 보다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함부로 쓰지 못했던 원기둥을 마음껏 세워 멋을 부렸다. 특히 별당채는 팔각으로 깎은 화강암 장초석을 사용해 공 들여 만들었다.

윤철하 고택 굴뚝
 
안채굴뚝 앙증맞게 생긴 굴뚝이다. 제일 후미진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기특한 굴뚝이다.
▲ 안채굴뚝 앙증맞게 생긴 굴뚝이다. 제일 후미진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기특한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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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채 굴뚝 오지그릇 밑동을 조심스럽게 깨서 굴뚝을 만들어 정이 더 가는 굴뚝이다.
▲ 문간채 굴뚝 오지그릇 밑동을 조심스럽게 깨서 굴뚝을 만들어 정이 더 가는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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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굴뚝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지 못했다. 사랑채 뒤편에 아궁이는 있는데 굴뚝은 보이지 않았다. 문간채 굴뚝은 솟을대문 서쪽에 있다. 오지로 만든 키 작은 굴뚝이다. 밑동을 조심조심 깨트려 만든 오지굴뚝이어서 정이 더 간다. 안채 뒤에도 굴뚝이 하나 남아있다. 멋을 전혀 내지 않고 후미진 곳에 숨어 제 할 일을 다하는 기특한 굴뚝으로 보인다.

예전에 이집 안채마당에는 화단 안에 키가 아주 큰 붉은 벽돌 굴뚝이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사진 한 장이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해남군청 자료에도 "대청 앞으로 적벽돌 굴뚝이 높게 세워져있으며 중앙에는 자연석으로 갓을 돌린 원형의 화단이 조성돼 있다"고 나온다.
 
안채 붉은 벽돌 굴뚝 예전에 안채마당에 화단을 조성하고 화단 끄트머리에 붉은 벽돌로 만든 굴뚝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 안채 붉은 벽돌 굴뚝 예전에 안채마당에 화단을 조성하고 화단 끄트머리에 붉은 벽돌로 만든 굴뚝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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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전후에 지어진 호남지역 부잣집이라면 이런 굴뚝 하나쯤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1912년 천석꾼 나종만이 세운 무안 유교리고택 안채굴뚝, 1913년에 지어진 두륜산 대흥사 앞 유선관 굴뚝, 1919년 조용준이 세운 곡성 봉정마을의 단산정사 굴뚝, 시기적으로 좀 떨어지나 1949년에 건립된 장흥 방촌마을 위성룡고택 굴뚝. 모두 적벽돌로 만든 크고 권위를 앞세운 굴뚝들이다.

우선 윤철하 고택 안채 굴뚝의 분위기는 유선관 굴뚝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안채 마당에 둥그런 화단을 만들고 화단 안에 굴뚝을 세웠다. 위를 둥글게 처리한 연가(煙家)는 무안 유교리고택 굴뚝과 많이 닮았다.

안채의 붉은 벽돌 굴뚝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붉은 벽돌 굴뚝이 있기는 했으나 정확하게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한참 전에 굴뚝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없애버린 것 같다"고만 했다.
           
과연 기능상 문제로 이 굴뚝이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후손들은 이 집안의 먼 윗대 조상들, 그러니까 은둔의 풍모를 지닌 고산 윤선도와 낙향해 새로운 삶을 꿈꾼 공재 윤두서에게 세상에 위세를 드러내는 이 붉은 벽돌 굴뚝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안채 뒤 조그만 굴뚝만 남기고 없애버리지 않았을까.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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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