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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한 안동 '임청각'입니다.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데요. 500년 역사를 지닌 고성 이씨 가문의 99칸 대종택입니다. 이상룡 선생은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뒤 이 집을 팔았습니다.

"이 땅에 그물이 쳐진 것을 보았으니 남아가 제 일신 아끼는 게 어디 있으랴" 선생이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며 남긴 말입니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올려놨다가 국권을 찾은 뒤에 읽어도 된다" 명문 유학자인 이상룡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잠시 책을 접습니다. 그리고 총칼을 쥔 군사를 길러냅니다. "너희들은 이제 독립군이다" 가문 재산으로 여겨지던 종들도 항일 무장투쟁에 동참시키고자 노비 문서를 불태웁니다.

무장투쟁 토대 이룬 '신흥무관학교' 활약

이상룡 선생이 이회영 선생과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의 산실이 됩니다. 김좌진, 김원봉, 지청천 등 3500여 명 독립운동가를 배출합니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의 밀약으로 1921년 무장독립군은 소련군에 강제 무장 해제당합니다. 바로 이곳 러시아 아무르 주 자유시, 스보보드니에서 일어난 사건인데요.

<조선민족운동연감>에 따르면 272명의 독립군이 피살됐고, 970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이 참변으로 희생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아무르주 제야강에서 "핏빛으로 물들어간 조선 선열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숨졌을 것"이라며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재산 잃고 외면 받고 '4대'가 고난 겪어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의 군자정. 그는 “공자·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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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1925년 임정 초대 국무령까지 지낸 이상룡 선생의 후손도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만주에서 조국으로 돌아왔던 외아들은 일제의 회유에 시달리다 자결했습니다. 손자는 만주 감옥에서 투쟁하다 해방 이후 남로당원으로 활동 중 전쟁에서 병사했습니다. 고아가 된 증손자 이항증 씨와 증손녀 이혜정 씨는 보육원에서 3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이상룡 선생 증손자 이항증 씨
"돈이 없어가지고 고아원에 간 건 나만 아니고, 내 여동생까지 고아원에 같이 갔어요. 위로 형이 네 사람이 일찍 죽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없는 조카가 아홉이 나왔어요. 재산이라곤 땅 한 평도 받지 못했는데, 걔들 크는 것까지 잘 보살펴 주지도 못했으면서 결혼할 때 여덟 번이나 혼주석에 앉아있었다. 이거는 말로, 글로 다 설명이 안 돼요. 이건 하늘만 아는 얘기지. 국가 공로가 있고 없고 둘째 문제고 종가에 있는 사람들이 보호하질 못해서 고아원에서 컸다. 이러면 가문으로 봐서나 유교로 봐서나 큰 충격이죠."


노동과 야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더불어민주당 이용득 의원도 이상룡 선생 후손입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가문 남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항증 씨 어머니이자 독립군 어머니였던 '임청각 종부' 허은 지사. 하루 20시간 넘게 일하며 독립군을 지원했지만 지난해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훗날 동생 이상동·이봉희,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증손자까지 이 선생을 포함해 4대에 걸쳐 9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았습니다.

서울현충원 임정요인 묘역에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이 바로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조선 땅이 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됐다 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다오" 1932년 6월 15일 이상룡 선생이 죽기 직전 동생에게 남긴 유언인데요. 해방 후 45년이 지나서야 지난 199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상룡 선생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였습니다. 일제 호적이 그대로 대한민국 호적이 됐는데, 당시 선생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호적은 2009년이 돼서야 바로 잡힙니다. 국적 회복에도 후손이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변호사 비용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국적 회복 관련 법률은 제정됐지만, 그 뒤처리는 개인에게 떠맡겨졌기 때문입니다. 후손들은 임청각을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아 국가에 헌납하려고도 했습니다.

'임청각 복원'만이 아닌 '친일파 청산' 이뤄져야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 이상룡 선생이 고향집 임청각을 떠나 만주로 향하며 쓴 고별시입니다. 그가 떠난 뒤, 일제는 이곳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놓았습니다. '불령선인' 불온한 조선인이 여럿 태어난 집이라는 이유에섭니다. 이 중앙선 철로 공사로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 99칸에서 50여 칸이 됐습니다. 문 대통령이 임청각을 거듭 언급하며 철로를 없애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앙선 복선화 사업이 2020년까지 추진됩니다. 임청각 복원에만 속도를 낼 것이 아니라, 친일파 청산과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서간도에서 혁신 유림이 그리워 한 고향 '안동'

석주 이상룡 선생을 배출한 안동은 혁신 유림의 땅입니다. 애국계몽운동을 한 일송 김동삼, 동산 유인식 선생이 있습니다. 안동의 인구 16만 중 독립유공자가 350여 명에 이릅니다. 조국이 흔들릴 때는 혁신을 결단한 '진정한 보수' 의식이 깃든 곳입니다. 최근 안동을 방문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국난 극복을 해결해 줄 구세주", "건국 100년 만에 나타난 인물"이라며 찬양을 쏟아낸 일부 유림을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이윱니다. 시민들은 "안동 선비 어데 가고 아첨쟁이 넘쳐나노"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조국을 구하고자 엄동설한에 가족을 이끌고 헐벗은 만주로 떠난 이상룡 선생, 그의 진정한 조국애를 제대로 이해하며 배우는 지혜가 아쉽습니다. 단비뉴스 최유진입니다.

(영상취재 : 최유진, 홍석희 / 편집 : 최유진 / 앵커 : 김유경, 임지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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