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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맞이는 방북 30주년을 맞아 당시 전대협, 노동계, 기독교, 학계, 통일운동, 일반 대학생 등 각 부분별로 7명의 기고문을 통해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 시대에 '늦봄의 방북사건'을 재조명하고, 판문점선언시대 문익환 방북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찾고, 이를 재평가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글은 이해동 전 한빛교회 담임목사가 보내왔습니다.[편집자말]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행사가 열린 2018년 6월 1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 문 목사의 가옥 '통일의 집'에 문 목사 그림이 내걸려 있다.
▲ 문익환 탄생 100주년 "통일의 집" 개관 늦봄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 행사가 열린 2018년 6월 1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 문 목사의 가옥 "통일의 집"에 문 목사 그림이 내걸려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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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고 문익환 목사께서 방북을 결행하신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문 목사님은 감행하신 것이다. 오랫동안 문익환 목사님과 지근거리에서 살았던 저로서, 문익환 목사님의 삶을 한마디로 성격지어 말하라면 서슴없이 '꿈 쟁이'라고 말할 것이다.

문 목사님은 굳게 닫힌 우리 역사의 벽에, 희망의 틈새를 연 '꿈의 사람'이었다. 그 꿈이 병든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분은 그 꿈으로 인해 번번이 고초를 겪으셨다. 거짓투성이의 현실에서 진실은 언제나 꿈일 수밖에 없고,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는 꿈일 수밖에 없고, 분단과 증오의 장벽 앞에서 통일과 평화는 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 목사님은 끊임없이 꿈을 꾸시고, 꿈을 노래하고, 꿈을 외치고 그리고 그 꿈을 몸소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비롯된 문익환의 '꿈'

문 목사님의 이와 같은 꿈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 문재린 목사님과 어머니 김신묵 권사님 내외분으로부터 이어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 목사님은 세상 최고의 가치를 '생명'으로 여기셨고, 그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파악하셨다. 이 생명에 대한 외경과 사랑 때문에 그는 순수해졌고, 용감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명사랑은 가족과 이웃을 넘어 무한히 확대되어 갔다.  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을 비롯하여 80년대에 걸쳐 불의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수많은 목숨들,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제 몸에 기름을 끼얹어 불 지르고, 허공에 몸을 던져 민족과 역사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숱한 젊은이들의 목숨들이 문 목사님에게는 남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 모두를 자신의 목숨으로 여기셨다. 문 목사님은 "살자 살자 죽음을 살자" 라는 시의 첫 소절과 끝 소절에서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살자 살자 죽음을 살자 / (중약) / 오늘도 죽음을 살자 / 해마다 개나리 진달래는 지고 피었다 지는 / 너의 죽음 나의 죽음  / 우리 모두 죽음을 눈 딱 감고 살자
이렇듯 문 목사님의 생명사랑은 당신의 피붙이 살붙이에서 비롯하여 이웃사랑으로, 민족애로, 인류애로 확대 승화되었고, 따라서 생명을 훼손시키는 불의와 악에 대하여는 불굴의 항거로 일관했다. 그분의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목숨을 내대고 분단을 거부한 통일운동도 그 뿌리는 생명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분단현실과 그것을 구실로 한 독재체제는 우리민족과 국민의 생명과 삶을 손상시키는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문 목사님에게 있어서 이 생명사랑의 길은 다름 아닌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 고난의 길이 바로 당신이 가야하고,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고 여기셨다.
 
"나의 길 당신의 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계신다.
난 이유 없는 이 길을 다시 가야 하는군요 / 그럴밖에 다른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 당신이 절망하면서도 / 절망하지 않고 가신 길 / 내가 누군데 안 갈 수 있겠습니까 
 
설교하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
 설교하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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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님은 1976년 3월 2일(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연행되신 날) 이래 돌아가신 1994년 1월 18일까지 18년 동안에 무려 여섯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셨고, 그동안의 옥살이 기간을 합치면 장장 11년이 넘는다.  

그는 감옥에서 여러 번의 단식투쟁 등 치열한 옥중투쟁을 감행하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수형생활 조건을 내걸고 투쟁하신 적은 없다. 언제나 함께 갇혀있는 동지 동료들 즉, 이웃을 위한, 민족을 위한 대국적인 투쟁이었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감옥살이의 조건이 열악하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는 그만큼 예수의 고난에 더 가까이 가는 것으로 여기셨다. 그의 생명에 대한 외경심도, 그 뜨거운 이웃사랑과 민족애도, 불굴의 투지와 용기도, 그 뿌리는 어김없이 신앙에 닿아있다.  

문익환 목사님은 분단과 독재의 절망적 현실에서 민주와 통일의 꿈을 꾸셨다. 민중이 자유롭게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민주의 꿈, 민족이 자주의 날개를 펴고 훨훨 날 수 있는 민족통일의 꿈을 끊임없이 꾸셨다.  그래서 평양의 봉수교회에 가셔서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절규하셨다.  

정말 '잠꼬대'가 아니었다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평양 봉수교회 앞에서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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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님의 시들은 꿈의 소산이고, 따라서 꿈으로 가득 차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꿈을 비는 마음>과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고 할 수 있겠다.

개똥 같은 내일이야 /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로 <꿈을 비는 마음>은 시작된다.

이어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휴전선 산정에 다다라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 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 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남북의 동남동녀들이 화촉을 밝히고 딸 아들을 낳는 꿈, 그도 아니면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넘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놀고 세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되어 강과 바다를 누비는 꿈을 꾸셨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 이르면 그 어른의 꿈은 더욱 황당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 기어코 가고 말거야 이건 /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 이건 진담이라고, 로 시작해서 1989년이 가기 전에 기어코 평양에 갈 것을 선언하고 있다.  

당시로써는 황당하기 이를 바 없는 꿈같은 말이다. 그러나 문 목사님은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은,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고,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며,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는 일로써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 휴전선을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 서울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 평양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 주장하는 일이라고, 절규하셨다. 1989년이 시작되는 새벽, 단숨에 쓰셨다는 이 시에서 읊으신 바대로 문 목사님은 평양행을 감행하셨고, 우리 민족사의 통일 장정에 한 획을 그으셨다.

이렇듯 문 목사님은 말만 하신 분이 아니었다.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고, 읊으신 꿈을 생시처럼 온몸으로 사신 분이셨다. 그분의 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명을 주는 까닭은 그분의 실천적 삶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 목사님이 꿈꾸신 민주와 통일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희망이고 과제다. 30년 전, 문 목사님께서 선취하여 직접 삶으로 꾸신 그 꿈들이 오늘날 우리역사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문익환, 그분은 우리 민족사에 기록될 위대한 꿈쟁이셨다.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져 일흔 여섯 해 동안 멋지게 신나게 꿈을 꾸고, 그 꿈을 몸으로 사시다가 25년 전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꿈처럼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그러나 목사님이 꾸시고 몸소 사신 그 위대한 꿈은 우리 민족사의 맥을 타고 지금도 맥박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 겨레의 가슴들에서 고동칠 것이라 믿는다.  
 
이해동 목사 (자료사진)
 이해동 목사 (자료사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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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익환, #통일맞이, #이해동목사, #이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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