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문맹으로 살았다. 글을 읽지 못하는 어머니의 말은 그래서인지 생동감이 있고 꾸밈이 없다. 인류는 7만 년 전부터 말(음성언어)을 사용해 왔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길어야 5천 년 전부터다. 말이 먼저 있고 글이 생겼으니, 구비(口碑)문학이 있고나서 훨씬 뒤에 기록문학이 등장했다. 같은 이유로 구비철학이 먼저 있고 기록철학이 등장했다. 글을 쓰지 않고 말만 한 소크라테스는 유럽철학의 시조로 꼽힌다. 공자의 말을 글로 정리해 놓은 게 <논어> 다.

조동일은 <창조하는 학문의 길>(2019)에서 구비철학이 철학이라고 인정하고, 구비철학은 진적에 세계 어느 곳에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철학사 이해의 관점이 달라진다고 했다. 해서 철학사는 표면과 내면의 관계를 가진 구비철학과 기록철학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게다. 내게는 구비철학의 전형이자 그 친숙한 사례가 어머니의 말과 삶이다.

내가 자라면서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 가운데 '천성'(天性)이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은 '천성이 그래'라는 식이다. 어머니는 사람의 타고난 본래 성을 '천성'이랬다. <중용> 첫 구절이 그 유명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아닌가! 하늘의 지엄한 명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품부되어 있는 바로 그 '천성'이 바로 인간의 본래성이다. 하여 그 본래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인간이 가야할 마땅한 길(率性之謂道)이랬다.

한글을 익히지 못한 어머니가 <중용>에 나오는 이 구절을 알고 '천성'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을 턱이 없다. 어머니는 문자로서 <중용>을 결코 접한 적이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체험적으로 혹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삶의 지혜로서 그냥 '천성'을 입버릇처럼 말한 게다. 해서 '천성'은 나의 어머니 구비철학 열쇠 말이 된 게다. 이 '천성'이라는 말끝에 어머니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곧 잘 사용했다. 지극한 정성, 정성이 지극(至誠)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그 감천(感天)을 말한 게다.

아닌 게 아니라 <중용>을 흔히 '성'(誠)의 철학이라 한다. '성'(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게 사람의 길이다. 해서 <중용>에서는 지극한 정성이래야 능히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고(至誠能化),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다(至誠如神)고 했다. 때문에 지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했다. 어머니는 <중용>의 이런 가르침을 두루 뭉실 묶어서 '지성이면 감천'이랬는가 보다.

<삼국유사>에 뱀처럼 기어 다니는 사복(蛇福)이라는 위인이 원효에게 죽은 자기 어머니를 위해 빌어 달랬더니 원효가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나무라면서 "죽고 사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유식이 무식이고 무식이 유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철학을 하고 있다. 때로는 사복이 원효보다 식견이 높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다.

어머니는 평생을 일하는 보람으로 살아왔다. 일이 몸에 베여 있어, 해월 최시형이 말한 '일하는 한울님'의 삶이었다. 어머니는 "죽어지면 썩을 몸 애끼서(아껴서) 뭐할 끼고"라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하시곤 했다. 나는 시골에서 일 잘하는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1960년대에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말은 해월 선생이 어느 동학교도 집에 들려 베 짜는 소리를 듣고 베 짜는 일을 누가하는가를 묻고는 주인이 우리 집 며느리가 한다고 하니, "일하는 며느리가 곧 한울님"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해월 자신도 늘 피신하는 최 보따리(해월 최시형의 별명; 그 보따리 안에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문집이 늘 들어 있었다) 신세였지만, 머무는 곳 어디서나 일하는 한울님으로 살고자 했다.

검소함이 몸에 베어 있던 어머니의 삶

일하는 어머니에게는 또한 검소함이 몸에 베여 있었다. 식성도 그냥 채소류를 좋아하셨고, 비린내 나는 생선도 싫어했다. 장날 무거운 쌀을 머리에 이고 십리 넘게 걸어가 그 쌀을 팔아 생필품을 사오시곤 했다. 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어도 장날 자신을 위해서는 국밥 한 그릇 사먹지 않고, 늦은 점심을 집에 와서 그냥 때우시고는 했다. 그래도 집에서 손수 만든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이웃과 두루 나눠 먹는 걸 좋아했다.

노자는 자기에게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이를 간직하고 있나니, 하나는 자애로움(慈)이고, 둘은 검약(儉)이고, 셋은 감히 앞서 나서지 않는 것(不先)"(<노자>67장)이라 했다. 일컬어 자(慈),검(儉).후(後)라고 한다. 어쩌면 어머니는 노자가 말한 세 가지 보물을 자연스레(천성적으로) 체득하신지도 모른다. 하여 어머니의 삶은 소박하면서도 자애로웠다.

어머니는 몸을 아끼지 않고 늘 일하는 몸으로 평생을 욕심 없이 살았기에 건강하게 장수하셨는가 보다. 96세에 지병으로 앓으신 적 없이 그냥 짚불 사그라지 듯이 편안히 자연사(自然死)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사람이 저렇게 조용히 숨을 거둘 수 있는가 싶어 신기하기 조차했다. 어머니의 삶과 죽음은 그야말로 생사불이(生死不二)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이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그리고 그 삶은 몸과 맘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이다
.
어머니는 돌아가시고도 내게 불가(佛家)를 향한 '한 소식'을 내게 선사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평소 어머니의 불심에 영향을 받았던지 집사람이 49재를 올려드리자고 했다. 막내아들인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나는 불가의 가르침과 그 분위기에 더욱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해 봄에 어머니 49재를 마치고 여름 방학 때 우연히 <대승기신론통석>(이홍우, 2006)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흔히 불가에서 말하는 한 소식 접하는 울림이 내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나는 서점에 꽂힌 기신론을 닥치는 대로 통독했고, <대승기신론통석>은 아마 지금까지 열 번 쯤은 읽었을 게다. 그러고 보니 이홍우 교수가 기신론을 매개로 내게 큰 공덕을 베푼 셈이다. 그간 나의 기신론 공부를 놓칠세라 정년하기 전에 논문도 한 편 남겼다.
 
해방둥이 막내로 나를 낳은 어머니 영정
▲ 어머니 박봉석(1910-2006)의 영정 사진 해방둥이 막내로 나를 낳은 어머니 영정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인간 존재는 과학적 해명을 넘어서는 신비성을 지닌다. 어쩌면 언설(言說)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게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하여 우리는 구비철학의 비의(秘意)에 주목하게 된다. 그게 곧 문자로 된 기록철학을 풍요롭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평생을 문맹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나에게 구비철학의 텍스트였다. 그리고 그 이상이기도 하다.
 

태그:#어머니의 구비철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