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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가 개최한 ‘기억을 말한다- 사북항쟁’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좌로부터 임채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신경 당시 동원탄좌 노조 대의원,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회장, 황인오 <사북사태 진상보고서> 저자, 안재성 작가가 토론하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가 개최한 ‘기억을 말한다- 사북항쟁’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좌로부터 임채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신경 당시 동원탄좌 노조 대의원,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회장, 황인오 <사북사태 진상보고서> 저자, 안재성 작가가 토론하고 있다.
ⓒ 신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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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은 내내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ㅡ 그들이 일어나면 천장을 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걸 시도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히 힘 드는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서 있을 때는 삽질하기가 비교적 쉬운데, 삽질할 때 무릎과 넓적다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으면 그 모든 무게가 팔과 복근에 실린다. 

그리고 다른 상황들도 일을 더 쉽게 해주지 않는다. 지열이 있다. 또 목과 콧구멍을 가득 채우고 눈자위 주위에 쌓이는 석탄 먼지,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가 있다. 그러나 광부들은 철인처럼 보이고, 철인처럼 일한다. 갱 안에서 벗고 있는 광부들을 볼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를 알게 된다." 


이는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직접 탄광 노동을 해보고 기록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에 나오는 광부들의 갱내 작업에 대한 묘사 가운데 일부다. 오웰은 지옥 같은 탄광의 풍경과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을 수십 쪽에 걸쳐 소설가다운 생생한 필치로 써내려갔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어도 탄광의 악명높은 노동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위험한 작업장에서 힘들게 일했지만 보수는 대졸자 초봉보다 못했다. 강원도 정선에 위치한 동원탄좌 사북영업소는 중앙정보부·지역경찰과 결탁하고 어용노조를 앞세워 광부들을 탄압했다.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회장은 "광부들은 노예처럼 일했고, 회사에 건의하거나 불평하면 즉시 해고시켰다"고 말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계엄령이 선포된 때였다. 전국광산노동조합이 임금 인상 42.75%를 요구하며 투쟁을 시작했지만, 동원탄좌는 사측이 내세운 어용노조 지부장에 의해 20% 인상으로 무마됐다. 이때 광부들의 항의 현장을 촬영하던 사복경찰들이 광부 2명을 자동차로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1980년 4월 21~24일까지 4일간 광부와 가족 6000여 명이 참여한 사북항쟁이 촉발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사북항쟁 당시 지도부에 속해 있던 신경씨는 지난 26일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가 개최한 '기억을 말한다- 사북항쟁' 토크콘서트에 참석해 "일만 했지 생활수준은 원시적이었다. 수도는커녕 우물도 없었고, 화장실도 없었고, 전기만 들어왔다"면서 "탄을 캐다 사람이 죽는 게 예삿일이었다. 사람이 죽어 나와도 장사도 못 지내고 일하러 가야 했다. 한 달에 25일 만근을 해야 월급이 나온다. 하루라도 덜 채우면 월급이 안 나왔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회장은 "암행독찰대라는 게 있다. 광부들의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24시간 감시해서 회사 총무과에 보고한다.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 작업 태만을 징계한다"면서 "징계위에 회부되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고, 주로 감봉 30%를 당한다. 이렇게 억울한 생활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원갑 회장은 이날 광부 100여 명과 아내 40여 명 등 관련자 140여 명이 국방부 보안대(현 기무사)에 끌려가 '고문'당한 사실도 밝혔다. 이들의 저항이 4일 만에 노·사·정 합의로 일단락됐고, 합의과정에서 체포와 처벌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음에도 5월 6일부터 검거가 시작됐다. 

"통닭구이, 물고문, 구타, 심한 경우에 몇 사람은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고문받다가 나중에 까무라친다. 지치고 실신한 상태에 있다가 수사관이 "너 했지" 하면 지장 찍게 된다. 큰 강당 같은 데에 다 모아놓고 조사했는데, 다른 사람 조사받는 거 다 볼 수 있다. 옆에서 봐도 울분이 터졌다. 여자 분들 중에 죽여달라는 분도 있었다. 아비규환이라는 걸 책에서만 봤지 거기서 이게 정말 아비규환이라고 느꼈다. 못 배워서 할 수 없이 들어온 게 광부생활인데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서 가정 파탄이 나고 지금까지도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다."

이날 참석한 임채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은 사북항쟁 이후 다음달인 5월 17일 밤에 광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바로 사북에서 투입 대기 중이었던 공수부대였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전했다. 
 
'기억을 말한다- 사북항쟁' 포스터.
 "기억을 말한다- 사북항쟁" 포스터.
ⓒ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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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도 조사관은 "다음달 5월에 광주항쟁이 이어지는데 사북사건을 조사하면서 말미에 광부들의 양보와 합의과정이 없었으면 80년 광주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4월 24일에 합의가 있을 당시에 (혹시 있을 합의 결렬을 위해) 총 500여 명의 공수부대와 기총소사 헬기가 출동 준비가 돼 있었다. 또 광부들이 끝까지 지킨 화약고에 사북 전체를 날려버릴 정도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임 조사관은 그러면서 "그 공수부대는 바로 광주로 갔다"면서 "사북 사건 때 부대원들 사이에서 '광부들에게도 사정이 있지 않냐'면서 민간 사건에 투입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고 하더라. 이후에 광주로 가서 어떤 일에서인지 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도 "사북은 골짜기라서 공수부대가 총 쏘면 다 죽는다"며 "만약 부대가 와서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면 과연 그 후에 광주는 어떻게 됐을까 의문도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가 80년 4월 21일 첫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다. 더 나아가 서울의 봄이라고 불린  투쟁이 여러 군데서 일어났다"며 "그게 이어지면서 5.18 광주에서 그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있었던 것은 사북 민주화 항쟁"이라고 평가했다.  

노동운동가 출신 저술가 안재성씨는 "탄광 파업이 되게 빠르다. 자동차 노조보다 더 빠르다. 활동가 모임에서 유인물을 한 번 뿌리면 쉽게 파업하고 그랬다. 첫 파업을 경험했던 경동탄광이 생각난다"며 "가보니까 광부들보다 부인들이 더 악에 받쳐 있었다. 사무실에 부인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하니까 사무실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경찰도 맞았다. 사람 대우를 못 받다보니 그런 게 쌓여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구금 피해자 149명에 대한 군사정권의 가해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난 2000년 수사·공판기록이 파기됐다. 그러나 2005년엔 사건의 주역인 이원갑, 신경씨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2008년엔 과거사정리위가 당시 연행·구금된 관련자와 가족에게 가해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국가의 사과를 권고했다. 2015년엔 재심을 통해 이씨와 신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 두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재판이 진행 중이다. 올해는 사북항쟁 39주년을 맞는 해로, 지난 21일 기념식에 참석한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국가기념일 제정과 기념사업회 등 다양한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태그:#사북항쟁, #민주화항쟁, #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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