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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제도권 작업자들의 자유롭고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제도권 밖 독립 작업자들의 모임 ‘삼색불광파’, 인문/사회 저널 『삼합: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창간호 발간
19.04.16 15:59l

검토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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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합: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 창간호 책표지 ⓒ 한하림
 
'삼색불광파'라는 수상한 이름의 단체에서 『삼합』이라는, 이 역시 범상치 않은 이름의 저널을 펴냈다. 저널의 표제는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잠시 책을 뒤로 돌려 목차를 살펴보면 독자들은 통일성이 다소 부족한 듯 보이는 글의 제목들에 조금 놀랄지도 모른다. 제목만 보아서는 이 글들이 왜 저 표제 아래 모이게 되는지 한눈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저널이라 하면 사상이나 취미 따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내는 동인지의 형태를 띠게 마련이다. 하지만 『삼합』에는 정치이론, 미학, 페미니즘, 교육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연구 작업자들을 비롯하여, 노래를 짓고 부르는 음악 작업자나 공연예술 창작자 등 서로 상이한 활동 반경을 지닌 청년작업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이로 인해 『삼합』은 단일한 저널에서는 보기 드문 다채로운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필진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대안대학' 출신이다. 일반적으로 대안 중·고등학교를 의미하는 '대안학교'는 오늘날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제도권에서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대안대학에 대한 인지도는 아직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삼색불광파는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대안대학인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이하 지순협 대안대학)의 졸업생들이 만든 모임이다. 2015년에 개교해 올해로 5년차에 접어드는 지순협 대안대학은 기존의 제도권 대학들이 지나치게 분과학문 중심의 교육에 치중한다고 비판한다. 많은 대학이 오늘날 학문의 필요성보다는 그것이 산출할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므로, 이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노선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이 피교육자를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문외한으로 만들고, 결국엔 공감과 협력에 무능한 파편적인 주체를 기른다는 것이다. 이에 지순협 대안대학은 '공감'과 '협력'의 기치를 내세우며, 통섭적 주체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지순협 대안대학 카페 참조: https://cafe.naver.com/freeuniv)
   
'삼색불광파'의 '삼색'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그것은 지순협 대안대학의 교육이념이기도 한 "대안사회를 위한 세 가지 분야의 이념과 운동[적(마르크스주의·노동)-녹(생태주의·환경)-보라(페미니즘·다양성)]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연대해야 한다는 데에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삼색불광파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세 가지 갈래의 활동 양식[연구(이론)-창작(예술)-기획(문화)]에서 각각의 지식과 기술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창간호를 펴내면서」 中)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1일, 서울혁신파크 청년청에서 『삼합: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의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정명준은 이날 저널에 실린 자신의 논문, 「불가능성과 불가피성 사이에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어떤 난점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 이영균
 
이들이 삼색불광파라는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삼색불광파는 기존의 제도권 대학들이 "세계에 대한 바른 길을 묻고, 답하고, 실천하기보다는 각자도생의 모델과 배타적인 경쟁심만을 부추기면서 취업을 위한 알선시장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비판한다(「창간호를 펴내면서」 中). 하지만 제도권이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비제도권 출신들이 자신의 학업이나 진로를 발전시켜 나가기가 제도권에 비해 나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렵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쪽으로는 돈이 잘 돌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되지 않으니 제도 밖에 있으려는 선생과 동료가 부족하다. 사람이 부족하니 소위 말하는 '판'이 형성되지 않는다. 판이 없으니 새로운 활동이 유통되지 않고, 자연히 비제도권에 있는 작업자들은 자신의 활동을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는 비단 학교에서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제도권은 스폰서의 불순한 의도가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큰 문제는 모든 활동을 제도권 '안에서만'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제도권에 있는 작업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적인 가치로 해소되지 않으면서도, 그 활동이 소비되고 인정되는 사회적 관계망 전반이 확대되어야 한다. 비제도권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방법을 고민하던 지순협 대안대학 졸업생들은 삼색불광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자기 작업의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장' 또한 당사자들이 함께 만들어가야겠다"(「추적, 삼색불광파!: 2017.12-2018.12」 中)는 생각에서 준비한 첫 번째 프로젝트가 바로 저널 '삼합'을 만드는 일이다.
   
『삼합』은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기획된다. 삼색불광파는 저널을 준비하기 전에 정기적으로 각자의 작업을 발표하고 피드백을 나누는 과정을 갖는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업자들로부터의 피드백은 창의적인 참고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따르면서 작업자들은 각자의 작업에 흐르는 공통된 주제를 발견해 이를 표제로 삼는다. 저널에 대한 기획이 먼저 있고 그에 적합한 필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작업자가 특정한 시기에 관심을 갖는 작업이 있고, 이를 모두 아우르는 적합한 주제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저널을 만드는 것이다. 목차에서 전체적인 통일성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사태(?)는 저널의 이러한 제작방식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는, 그 안에 흐르는 공통된 주제가 글 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간기념회에서는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주제 토론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주최측은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주제에 대한 짧은 생각을 모았다. ⓒ 이영균
 
창간호 『삼합: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들이 차례로 실려 있다. △「삼색불광파 안내지: 삼불파의 '또 다른 시작'에 관하여」(우준범), △「불가능성과 불가피성 사이에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어떤 난점에 관하여」(정명준), △「알튀세르의 사유에서 개념적 성좌를 포착하려는 분투: 두 가지 "알튀세르 효과"의 관계를 중심으로」(심광현) △「'내적 거리내기'에 대한 소고」(이영균), △「두 번의 졸업과 배움: 화이트헤드와 피스모모의 교육론을 함께 보다」(한별), △「예술의 알려질 수 없는 것에 대하여(1): 칸트의 미적 기예와 반성적 판단력 개념을 중심으로」(박두헌),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Goa Contact Festival, India, 2019.1」(김기영), △「노래를 짓고 부르는 것에 대해」(강화원).
    
우준범은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 그룹 E.A.T.(Experiments Art and Technology)의 사례를 통해, 삼색불광파의 향후 방향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공동 창작물 자체보다, 연구자·창작자·기획자 간의 협력관계를 개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창간호에서 가장 비중 있는 소논문을 쓴 정명준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혁명의 가능성을 사고한 맑스주의 이론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존재하는 난점을 지적하며,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에 대한 알튀세르의 해석에서 혁명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심광현(지순협 대안대학 운영위원장(대),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은 세계자본주의가 이행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의 알튀세르 효과와 그 이전의 알튀세르 효과를 구분하고,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파악할 것을 제안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정명준의 글을 해석하고 논평한다. 이영균은 소격효과 개념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의 자유와 기준의 상대성에 대해 고민한다. 박두헌은 칸트의 미학 개념들을 통해 예술 일반에 존재하는 제작자의 의도와 수용자의 감상 사이의 차이가 좁힐 수 없는 거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 거리가 지닌 비판적 가능성은 내재적인 근거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강화원은 졸업 후 자신의 음악 창작에 대한 고민을 짧은 글로 쓰면서,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은 일상을 겪으며 갖게 되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을 가사에 담아 노래로 만들었다. 지면에 QR코드를 실어, 음원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이 외에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안 교육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장르인 컨택즉흥 무용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저널은 다채로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강화원은 저널의 지면에 QR코드를 실어 자신이 만든 노래의 음원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그녀는 출간기념회에서 창간호에 실은 수록곡을 발표했다. ⓒ 이영균
 
삼색불광파의 저널 『삼합』은 2019년 3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연 2회 발간될 예정이다.
 
저널의 가격은 10,000원으로, 구입을 희망하는 사람은 이메일이나 SNS 등을 통해 문의하면 된다.
 
[삼색불광파]
주소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청년청 312호
이메일 redgreenpurple@naver.com
Facebook /3redgreenpurple
Instagram @_redgreenpurple_  
삼색불광파 대원들 ⓒ 이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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