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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드나들던 목욕탕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빛깔의 공간이었다. 목욕탕에 가는 제일 큰 이유가 묵은 때를 벗기는 거였으니까.

일 년에 딱 두 번, 설과 추석에 읍내에 있던 목욕탕에 가신다던 시아버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또 줄줄이 집안 등골 빼먹는 계집애만 내리 낳는다고 설움 받던 친정엄마가 명절을 핑계로 네 명의 딸들을 앞세우고 가던 곳도 목욕탕이었다. 

첫째 딸인 나부터 막내딸까지 때를 밀어주느라 기진맥진이 되던 우리 엄마는 이제는 팔순이 되셨다. 그런 당신이 조물조물 손발에 낀 때를 밀어주던 어린 딸들은 50대 전후반의 중년이 되었다.

요즘도 어쩌다가 엄마와 함께 목욕에 갈 때면 내 한 몸의 때를 밀기도 지쳐 엄마 몸은 씻겨드릴 엄두도 못 낸다. 언제부터인가 엄마까지 세신사에게 부탁하는 나는, 어린 시절 내 젊은 엄마를 흉내도 못 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우리들의 때를 밀어줄 동안 얌전히 앉아 있기라도 했다면 엄마가 덜 힘들었을텐데... 물장난을 하느라 부산을 떨었으니 얼마나 기운이 달렸을까. 목욕하면서 하도 나댄다고 등판을 맞을 때도 있었지만 아픈 것도 잠시이고 우리는 물놀이 온 것처럼 신나게 놀았다. 

수증기가 자욱한 탕에서 아이들과 엄마들의 목소리가 엉켜있던 풍경은 지금과 비교해보면 많이 다르다. 결혼 후엔, 시어머니와 단둘이만 가기가 뭣해서 친정엄마까지 모여 셋이 많이 다녔다. 어쨌든 그때는 두 분의 어머니보다는 젊었던 내가 등을 밀어드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그만둔 지 여러 해 되었다.

쪼르륵 넷이나 되던 우리 엄마의 딸내미들은 모두 온탕에 오글오글 들어앉아 때가 불기를 기다려야 했다. 때가 잘 불어야 엄마의 때밀기가 수월했을 터였다. 순서대로 불려나가 엄마 앞에 앉으면 엄마의 때밀기가 시작되었고, 아프다고 징징대며 꼼지락대기라도 할라치면 뭐가 아프냐고 등판을 맞기도 했다.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면 가지고 온 깨끗한 옷들로 갈아입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새 옷을 입기 전에 옷들을 탁탁탁 털어 입곤 했다. 어쩌면 너나없이 머리에 달고 살던 머릿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명절맞이처럼 벼르다 가는 목욕탕이었다. 입던 속옷을 준비해 간 빨랫비누로 빨기까지 했으니 그 북새통 목욕탕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명절맞이 행사였다. 요즘은 탈의실에서 옷 털어 입는 것을 본 지 오래다. 뿐만 아니라, '빨래 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문득 예전 살던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 내에 붙어있던 협조 안내문이 생각난다. '탈의실에서 옷을 털어 입지 마세요.' 매일 속옷을 갈아입는 요즘, 스멀스멀 기어 다니던 이가 없어진 지 오래여도 아직도 습관처럼 옷을 털어 입는 사람이 있나 보네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어린 나에게 목욕탕은 서로 등을 내밀고 때를 밀어주던 풍경이 낯설지 않던 곳이다. 눈인사라도 나누던 사이라면 당연히 물어보던 말, '등 밀었어요?' 이 말은 곧 '내가 밀어줄까요?'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웃끼리 만나면 가볍게 웃어주듯이,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때수건을 내밀며 서로의 등밀이를 가볍게 부탁해도 되던 곳이어서, 낡았어도 낡지 않은 인심으로 풍요로웠던 곳이다.

한 칸짜리 소박한 곳이어도 반짝이는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했던 목욕탕은 풍요의 느낌을 알게 해준 추억과 현재가 함께 어우러진 진행형 공간이다. '나, 빛나지?'라며 외치지 않는 동네 목욕탕의 투박함과 무뎌진 조약돌의 완만함이 전해지는 수더분한 목욕탕, 나는 아직도 그런 목욕탕이 참 좋다.

이제는 다 커버려 50+세대가 된 나는 지금도 쉼표가 그리울 때 여전히 목욕탕에 간다. 42˚C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면 '나도 모르게 사는 게 별건가, 이런 게 행복이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제는 때를 불리고 벗기는 일보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호사스런 휴식에 가깝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울고 싶을 때 가기 좋은 곳도 목욕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욕탕은 물소리와 사람들 소리에 묻혀 표 안 나게 울 수 있는 곳이 되었고, 나를 화병에 가두지 않을 수 있게 만든 치료제로 거듭난 곳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 울다가는 왠지 집안에 슬픔이 덕지덕지 붙을까 봐 맘 놓고 울기에 별로일 때, 나는 목욕탕에 간다. 이사를 가면 그 동네를 돌아보며 제일 먼저 찾아보는 것도 목욕탕이다. 맘 먹고 울고 싶을 때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공간을 마련해 두는 나름의 방책인 셈이다.

목욕탕에서는 꼭 소리 내어 울지 않아도 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게 내 몸 속의 수분이 버려지는 게 좋다. 그런 이유로 목욕탕은 나에게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해주는 물꼬이며 진정제인 셈이다. 모나지 않게 나를 품어주고 편안한 위로를 알게 해준 고마운 공간, 난 목욕탕 가는 게 참 좋다.

태그:#일상, #목욕, #힐링 공간, #추억,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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