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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금당맛질 반서울'
  
 ‘금당맛질 반서울’ 돌비석 금당실마을과 맛질마을의 ‘반중간(半中間)’에 서있다.
▲ ‘금당맛질 반서울’ 돌비석 금당실마을과 맛질마을의 ‘반중간(半中間)’에 서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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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에는 '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낯선 말이 떠돈다. 내 귀에 그렇게 들릴 뿐, 마을사람들한테는 친숙한 말이다. 금당실마을과 맛질마을을 하나로 보면 반은 서울이라는 말이다. 작은 두 마을에서 높은 벼슬에 올라 국정을 담당하는 이가 많이 나와 반은 조정(朝廷)같다하여 반서울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

항간에는 금당실에 99칸 대저택을 소유한 세도가, 이유인이 서울나들이를 자주 하고 작은맛질에 사는 처사(處士) 권경하 집에 놀러갈 때 그 행렬이 한양의 왕가행차와 같다고 하여 유래했다 하기도 한다.

예천에는 '금당실가서 옷 자랑 하지 말고 구계 가서 집 자랑하지 마라'는 얘기가 있다. 구계의 집자랑은 남악종택을 두고 하는 말일 게고 금당실의 옷 자랑은 이유인의 차림새 때문에 나왔는지 모르겠다.

금당실을 동쪽으로 벗어나 낮은 고개를 넘자 '금당맛질 반서울' 돌비석이 서있다. 제곡리, 대제리 가는 길목에 있다. 얼마가지 않아 오래된 소나무가 맛질의 시작을 알린다. 맨 먼저 나오는 마을이 제곡리의 작은맛질이고 한천(漢川) 너머에 있는 마을이 대제리의 큰맛질이다.

작은맛질
  
작은맛질마을 정경 야옹정, 춘우재고택, 연곡고택, 함취정 같은 옛집들이 점점이 박혀 맛질의 고색을 짙게 한다.
▲ 작은맛질마을 정경 야옹정, 춘우재고택, 연곡고택, 함취정 같은 옛집들이 점점이 박혀 맛질의 고색을 짙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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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맛질은 야옹(野翁) 권의(1475-1558)가 1545년경 들어와 정착한 안동권씨 집성마을이다. 권의는 봉화 닭실마을 입향조, 권벌의 맏형이다. 맏이가 세거한 마을이라 맛질이라 했다.

작은맛질은 경북 영양의 두들마을에서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어머니 본가(외가) 마을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권씨를 유곡권씨로, 맛질마을은 맛질권씨로 불리니 이래저래 작은맛질의 위세는 이만저만한 마을이 아닌 것이다.

권의의 후손은 야옹정, 춘우재고택, 연곡고택, 함취정을 남겼다. 모두 고색 짙은 그윽한 집이다. 야옹정은 1566년 권의의 아들 권심언이 아버지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고 춘우재고택은 권의의 손자, 권진이 지은 집이다. 연곡고택은 권의의 8대손 권성익이 1795년에 지었다. 함취정은 권의의 손자, 권욱을 기리기 위해 1643년에 세웠다.
  
함취정(咸聚亭)   산 중턱에 있는 함취정은 찾는 이 드물다. 여기서 어슬렁거렸으니 마을할아버지에게 오해를 살만했다.
▲ 함취정(咸聚亭)  산 중턱에 있는 함취정은 찾는 이 드물다. 여기서 어슬렁거렸으니 마을할아버지에게 오해를 살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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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우재고택 굴뚝  유세를 부리거나 권세를 자랑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약을 보급하고 사회교화에 힘쓴 야옹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려한 것인지 만사루 밑에 다소곳하게 앉혀 놓았다.
▲ 춘우재고택 굴뚝  유세를 부리거나 권세를 자랑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약을 보급하고 사회교화에 힘쓴 야옹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려한 것인지 만사루 밑에 다소곳하게 앉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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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우재고택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여 방해하고 싶지 않아 사랑채 굴뚝만 보고 서둘러 나왔다. 키 작은 사랑채 굴뚝은 몸은 암키와로, 연가는 수키와로 만든 것으로 소박하나 잘 생겼다.

수키와 골을 하늘을 쳐다보게 하면 경쾌하나 가볍게 보인다. 이 굴뚝은 골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다소곳하고 점잖게 보인다. 연곡고택은 참 정갈한 집이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강아지 닮은 마루 밑 굴뚝을 아무 말 없이 한번 쓰다듬어 주고 나왔다.
  
연곡고택 굴뚝  연곡은 금당실마을 박손경의 문인으로 행실이 발라 존경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연곡의 깔끔한 성품인지 고택은 정갈하기만 하다. 굴뚝은 마루 밑에 허세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다.
▲ 연곡고택 굴뚝  연곡은 금당실마을 박손경의 문인으로 행실이 발라 존경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연곡의 깔끔한 성품인지 고택은 정갈하기만 하다. 굴뚝은 마루 밑에 허세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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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정을 찾아 헤매던 중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함취정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야옹정으로 잘못 알고 갔던 것이다. 멀리서 마을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상대방을 왠지 주눅 들게 하고 못마땅해 하는 감정 섞인 경북 말투였다.

"거 우리 정잔디 누구니껴?" 사정 얘기를 하니, 내 앞을 한참 앞장서서 야옹정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할아버지의 언짢은 기분은 이제 누그러진 거로 보였다. 헤어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그 말이 걸작이다.

"욕은 안 묵을 지 모르겄소만, 잘 보고 가이시더."

할아버지의 말투나 사투리는 예천 사람, 안도현 시인의 <예천> 시를 참고하여 내 기억을 더듬어 되새겨 보았다. 야옹정은 수리중이어서 못보고 왔지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내내 머리에 남았다. 정자나 마을에 대한 겸손하면서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다.

작고 낮은 것이 주는 행복
  
미산고택  큰맛질마을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외딴집이다.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고 아담한 집이다.
▲ 미산고택  큰맛질마을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외딴집이다. 허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고 아담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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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고택 안채   낮은 지붕, 좁은 안마당, 작은 문, 조그만 창, 모나지 않은 둥근 돌계단의 안채를 보고 있으면 살뜰한 안주인이 그려진다.
▲ 미산고택 안채  낮은 지붕, 좁은 안마당, 작은 문, 조그만 창, 모나지 않은 둥근 돌계단의 안채를 보고 있으면 살뜰한 안주인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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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과 대수마을의 물은 금곡천이고 맛질마을 물은 한천이다. 모두 예천읍에 모여 내린천으로 들어간다. 한천을 넘으면 큰맛질마을이다. 큰맛질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 미산고택이 있다. 금당실에서 1650년 함양박씨 박세주가 큰맛질로 들어온 후 5대손 미산 박득녕이 1825년에 이곳에 옮겨지었다.

6대에 걸쳐 117년간, 근대생활일기(저상일월 渚上日月)를 쓴 대단한 집안이다. 박한광이 1834년에 시작해서 박득녕(1808∼1886), 아들 박주대(1836∼1912), 손자 박면진(1862-1929)을 거쳐 증손 박희수(1895-1951), 현손 박영래까지 계속해서 쓰다가 한국전쟁으로 1950년에 끝낸다.

박주대는 가재를 털어 독립자금을 댄 인물이다. 박주대의 누이 함양박씨(1824-1877)가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김진린과 결혼하여 얻은 아들이 그 유명한 백하 김대락이고 김대락의 여동생의 남편이 석주 이상룡이다. 김대락은 박주대의 조카고 이상룡은 조카사위다. 박주대는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1925년 가을비 내리는 날,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심산 김창숙이 미산고택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는 내용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925년은 심산이 독립기지건설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에 잠입한 해다. 미산고택 함양박씨 집안은 심산과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한 석주의 인척집이고 이 집안의 반일에 대한 사상내력이 심산의 방문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눈꼽재기창과 안채 방문   이집은 창과 문을 크게 하여 과시하지 않았다. 창은 눈곱만하게, 문은 사람하나 겨우 드나들 정도 크기로 절제하였다.
▲ 눈꼽재기창과 안채 방문  이집은 창과 문을 크게 하여 과시하지 않았다. 창은 눈곱만하게, 문은 사람하나 겨우 드나들 정도 크기로 절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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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6대에 걸쳐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의심도 해보지만 사실이다. 집념일까, 열정일까, 난 꼼꼼함이라 생각한다. 미산고택을 들어서자마자 내 생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랑채, 안채, 곳간채, 부엌, 뒤뜰, 마당, 사랑채 방과 안방, 다락방의 공간에 문과 창, 섬돌, 아궁이와 굴뚝들이 빈틈없이 오밀조밀 완벽하게 꽉 들어차, 퍼즐완성품을 보는 것 같다. 꼼꼼하다. 문과 창, 마당은 물론 지붕, 돌계단, 섬돌, 굴뚝까지 모두 작고 낮다.
  
사랑채 문과 섬돌  이 집의 사랑채 문과 섬돌은 겸양의 미를 가르친다.
▲ 사랑채 문과 섬돌  이 집의 사랑채 문과 섬돌은 겸양의 미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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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일기를 아직 쓰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을까?

"오늘은 봄 햇살이 사랑채 대청마루 팔각불발기문에 살며시 다녀갔다. 서울 언저리에서 왔다는 한 남자가 사랑채와 안채, 후원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가더라. 안채 대청에 앉아 삐걱거리는 판자문을 열고 문틈사이로 산수유를 보고는 무척 행복해 했다. 무슨 연유인지 보잘 것 없는 뒤뜰 굴뚝을 보고 무슨 말인가 주고받더니 그렇게 편안해 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굴뚝을 본다하더니만 대문채 구석진 곳을 훑어보고 "되돈고래 굴뚝이군!", 혼잣말을 하는데 그 모습이 누구한테 홀린 듯하였다. 안채방에 들어서서 소꿉장난하듯 만들어 논 눈꼽재기창이며 다락방의 바라지창을 보고는 얼굴에 홍기를 띠고 감탄사를 토해내더라. 혹시 더럽게 보일지 몰라 민망해서 혼났다. 손뼘재기로 사랑채 방문을 재보고 그 아래 댓돌을 유심히 살피더니 평화와 평온을 얻은 듯 행복해 하더라. (己亥年, 三月十六日)"

 
미산고택 뒤뜰 굴뚝 잘 보이지 않은 뒤뜰이라 허세를 부릴 만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거의 장식을 하지 않은 절제된 굴뚝은 대대로 내려오는 이 집안사람들의 성품이 배어 있는 정제품을 보는 것 같다.
▲ 미산고택 뒤뜰 굴뚝 잘 보이지 않은 뒤뜰이라 허세를 부릴 만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거의 장식을 하지 않은 절제된 굴뚝은 대대로 내려오는 이 집안사람들의 성품이 배어 있는 정제품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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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면서 남긴 장독 대대로 의지하며 열정과 집념으로 꼼꼼하게 일기를 써온 이 집안사람들처럼 보인다.
▲ 집을 떠나면서 남긴 장독 대대로 의지하며 열정과 집념으로 꼼꼼하게 일기를 써온 이 집안사람들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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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두 개가 서로 의지하며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고 서있다. 집주인이 남긴 당부의 말이 들린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집을 비우고 떠나지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서글퍼하지 말고 서로 의지하라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로 서로 의지하며 끈끈하게 이어온 미산고택의 본모습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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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