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제주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기자회견 4월 19일 제주4.3도민연대와 제주4.3 수형인들이 제주4.3당시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서류를 제출하러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창용(32년생), 오영종(30년생), 오희춘(33년생), 양근방(33년생)
▲ 제주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기자회견 2017년 4월 19일 제주4.3도민연대와 제주4.3 수형인들이 제주4.3당시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서류를 제출하러 이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창용(32년생), 오영종(30년생), 오희춘(33년생), 양근방(33년생)
ⓒ 박진우

관련사진보기

 
"체포 당시에 고문 받은 것이 머릿속에서 다 사라지도록 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재심) 재판을 빨리 완결하고 우리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해서... 여생이 몇 년 남지 않았는데 나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눈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2018년 3월 19일 제주4.3 피해자 현창용(당시 87세)씨가 재판정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남긴 말이다. 

이 발언에 앞서 현창용씨는 "넓은 가죽 벨트 두 개를 갖고 한쪽에 한사람씩 양쪽에서 옷을 벗겨놓고 저를 번갈아 쳤다. 등이 새까맣게 물들도록 맞았다. 오전에 그렇게 맞고 오후에 또 맞았다"면서 1948년 당한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당시 16살이던 현씨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잠을 자다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현씨는 고문을 당한 뒤 당시 경찰들이 임의로 조작한 조서에 지장을 찍었다. 이후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인천형무소로 옮겨졌다. 1년 7개월가량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는 인천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평양으로 끌려갔고 20여 일 동안 기본훈련을 받은 뒤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1951년 남원에서 체포됐다. 이적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20년 형으로 감형됐고 형기를 모두 채운 뒤에야 1974년 만기출소했다.

지난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은 현창용씨에 대한 1948년 공소는 '그 자체로 무효였다'라면서 사실상 무죄를 의미하는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제주 4.3 생존수형인 현창용 옹이 지난달 소천했다.
 제주 4.3 생존수형인 현창용씨가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 임재성

관련사진보기

 
현창용씨는 20여일 뒤인 지난 2월 7일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와 같은 피해를 당한 수형자는 기록상으로는 2530명.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인 1999년 9월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4.3특위 부위원장 추미애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수형인 명부를 발굴해 공개함으로써 이들의 전모가 밝혀졌다.

이들 수형인 중 살아남은 18명이 지난 2017년 4월 재심을 청구했다. 이들의 변호는 법무법인 해마루 임재성 변호사가 맡았다. 제주4.3 71주년 이틀 전인 지난 1일, <오마이뉴스>는 그에게 관련 내용을 들어봤다. (2017년 재심 청구 당시 생존 수형인은 30명이었다. 그중 18명이 재심을 청구한 것이다. 재심 청구한 이들 중 한 명과 재심신청을 하지 않은 생존 수형인 한 명이 사망해 현재 생존 수형인은 28명이다.)
  
"공소기각, 무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결과"
 

임재성 변호사는 "역사적 사건을 7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법적으로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라면서 "무죄보다 더 적절한 '공소기각'을 이끌어냈다"라고 자평했다.

임 변호사가 말한 '공소기각'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경우, 심리를 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것을 말한다. 법원은 제주4.3 당시 나온 판결에 대해 공소기각을 결정함으로써 당시 재판이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재심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재판기록 뿐 아니라 수형기록조차 없었다"라면서 "수형인 2500여 명의 명단이 발견되기까지는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몰랐다. 수형인들은 재판 같지도 않은 재판을 받았고, 육지에 있는 형무소에 가서야 자신들의 형이 몇 년인지 알게 됐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 변호사는 "더 웃긴 건, 재판과 수형기록은 없는데 전과를 조회하면 '1948년 내란죄' 등 기록은 남아있었다"라면서 "어디선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틀어버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의 노력이 컸다. 2015년 이번 소송을 주도한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가 그가 속한 법무법인 해마루를 찾았을 때만 해도 법조인들 모두 '재심은 어렵다'라고 봤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임 변호사는 2016년 도민연대를 만난 자리에서 생존 수형인들의 재심을 제안했다. '죽기 전 법정에서 무죄를 확인하고 싶다'는 제주4.3 생존 수형인들의 바람이 임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역사 자료, 관련 사례, 생존자들의 진술을 1년 동안 모았다. 제주4.3 70주년을 1년 앞둔 지난 2017년 4월 제주지방법원을 방문해 4.3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제주4.3 발발 69년 만에 생존 수형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첫 번째 재심 요구였다.
  
재심청구인들은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7월 사이에 군‧경에 의해 제주도 내 수용시설에 구금됐다가 다른 지역 교도소로 이송돼 수형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무장대에게 음식을 줬거나 경찰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허위 조서를 작성했다가 군사재판에서 내란이나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했고, 기소사실에 대한 통보도 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재판 절차가 없었다. 형을 살고 난 뒤에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주변에 아무 말도 못한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반공을 앞세운 군사정권 시절에는 '재심'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로 함께 고통 당했다.

"제주4.3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수형생활을 한 수형 피해자들이 제기한 군사재판 재심 청구 최종선고가 17일 내려졌다. 이날 오후 임재성 변호사가 수형 피해자 기자회견 도중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1.17
 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수형생활을 한 수형 피해자들이 제기한 군사재판 재심 청구 최종선고가 17일 내려졌다. 이날 오후 임재성 변호사가 수형 피해자 기자회견 도중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19.1.17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기록된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규정돼 있다.

피해는 일방적이었다. 이 기간에 적게는 1만 4000여 명, 많게는 3만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경은 한라산으로 올라간 무장대를 토벌하려고 중산간 마을에 있던 사람들을 해안가 마을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소개령(이주명령)을 접하지 못한 상당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군‧경에게 붙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잡혀간 주민들은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후에 서울과 대구, 전주, 인천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제주4.3 생존 수형인이 됐다.

임 변호사는 "생존 수형인의 재심을 다루는 건 처음부터 어려움이 컸다"라면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당사자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였다"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2016년경 생존 수형인은 30여 명에 불과했다. 이중 제주에 거주하면서 재심 청구 의사가 있는 분들 18명만 우선적으로 2017년에 재심을 청구한 것"이라면서 "감옥까지 갔다 온 두려움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희생자 신고도 안 했다. 어렵게 재심 청구를 해도 재심이 안 됐을 때 겪을 박탈감 때문에 신청을 주저한 분들도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2530여 명의 피해자 대부분 언제 구금과 고문을 당했는지 확인이 안 된다. 수형인 명부에는 '384명에게 사형을, 305명에게는 무기징역을, 97명에게는 징역 20년을, 570명에게는 징역 15년을, 706명에게 징역 7년, 235명에게 징역 5년, 29명에게 징역 3년, 202명에게 징역 1년이 각각 선고했다'라는 기록만 남아있다.

지난 1월에 공소기각을 받은 18명의 피해자들은 당시 16살부터 27살에 불과한 청소년과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징역 1년에서 15년, 심지어 무기징역 형량을 받았다.

"국가적인 배보상 필요"
  
 70년간 수형인이라는 낙인 속에 억울하게 살아온 4·3 수형 피해자들이 17일 오후 군사재판 재심 청구에 대한 최종선고가 내려질 제주지법 201호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9.1.17
 70년간 수형인이라는 낙인 속에 억울하게 살아온 4·3 수형 피해자들이 17일 오후 군사재판 재심 청구에 대한 최종선고가 내려질 제주지법 201호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2019.1.17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임재성 변호사는 "이제 남은 과제는 피해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의 문제"라면서 "7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왜 지금 배상, 보상하냐 등 이런 말을 많이들 하는데 제주4.3 같은 경우는 다른 과거사 사건과 다르게 개별적인 배‧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지원된 것은 한달에 10~20만 원 정도했던 의료지원금 등이 전부였다"라고 강조했다.

임 변호사는 이어 "국가가 책임을 인정한 만큼 이제는 피해자들에게 배‧보상을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재심에서 승소한 제주4.3 생존 수형인들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 구금을 보상하라며 지난 2월 22일 제주지방법원을 찾아 형사보상청구서를 제출했다. 형사보상청구는 형사보상법에 따라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 구금됐던 자가 불기소처분이나 무죄 판결을 받은 때 국가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생존 수형인 12명(최근에 1인 사망)과 숨진 수형인 2500여 명에 대한 재심 역시 남아있다. 특히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실형을 선고받고 육지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목숨을 잃은 2500여 명 중 상당수는 시신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유해 수습을 못하고 있다.

임 변호사는 "개개별의 소송이 가능하면 좋지만 결코 최선의 방식이 아니다"라면서 "전과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 피해자로 지정돼 10~20만 원 주는 게 먼저가 아니라 불법적으로 묶여있던 전과기록 삭제가 우선이다. 거기까지 우선 나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3일 오전 10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에서 열린 71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는 정부를 대표해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 총리는 "제주도민들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다하겠다"면서 "희생자 유해 발굴 및 실종자 확인, 생존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지원 확대, 국가 트라우마 치유센터 설립, 배·보상 등 입법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와 협의하면서 정부의 생각을 제시하겠다"라고 밝혔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