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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 선생
 동농 김가진 선생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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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은 왜 혁명가가 됐을까

구한말 명문세가에서 태어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왜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일본이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반납하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했을까? 나는 그 근본 원인은 동농 선생이 서얼, 곧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허균의 <홍길동전>에 보면 홍길동은 서자 출신이었다.
 
길동이 점점 자라 여덟 살이 되자, 총명하기가 보통이 넘어 하나를 들으면 백 가지를 알 정도였다. 그래서 공(公)은 길동을 더욱 귀여워하면서도 길동의 출생이 천하여, 길동이 '아버지'나 '형' 하고 부를 때마다 즉시 꾸짖어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길동은 열 살이 넘도록 감히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고 종들로부터 천대 받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한탄하면서 마음 둘 바를 몰랐다. 어느 가을 길동은 검술을 익히다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소인이 평생 서러워하는 바는, 소인이 대감의 정기(精氣)를 받아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고, 또 낳아서 길러 주신 어버이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길동이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적삼을 적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동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혁파하고자 집을 떠난 뒤 혁명가가 된다. 

지난 1월 10일, 김 회장과 점심식사를 한 뒤 우리는 다시 로얄빌딩 6층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실로 돌아와 곧바로 대담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 2시에 김 회장이 외부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운장(자택)에서 김가진 선생
 백운장(자택)에서 김가진 선생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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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는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였다는데 '조선민족대동단'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조직이었습니다. 그해 4월 초에 결성됐는데, 곧 파리강화회의에 '진정서'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발송했습니다.

5월에는 선언서를 발표,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영원의 평화 확보' '사회의 자유발전을 광파할 것' 등 3대 강령을 제시했습니다. 또 '일본 국민에게 고한다'는 경고문도 발표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직이 노출돼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투옥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발간 <사진으로 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1945>에서 '대동단결의 선언'을 볼 수 있었다.
 
<대동단결의 선언>
 <대동단결의 선언>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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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독립선언

"1919년은 항일독립투쟁사에 한 획을 긋는 해였습니다. 3․1 독립선언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독립선언이 세 차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어요."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차분히 부연 설명을 했다.

첫 번째 독립선언은 그해 2월 1일 중국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이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이다. 조소앙이 기초한 이 선언은 1919년 독립선언의 기폭제였다. 2월 1일이 음력으로 무오년이었으므로 '무오독립선언'이라고 일컫는다.

그 일주일 뒤인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 대표들이 도쿄 YMCA 강당에서 두 번째로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때 유학생들이 선언문을 국내로 전파시켰다.

그리고 그 세 번째로 3․1독립선언이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일독립만세운동이다. 그해 11월 28일 서울 안국동 네거리에서 네 번째로 대동단의 독립선언이 있었다. 이 일은 독립운동 자료집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위 시작하자마자 일경에게 체포된 탓이다. 

- '조선민족대동단'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동'이라는 말은 <예기>에 나옵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로버트 오언의 '공상적 사회주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그 여생을 미칠 곳을 가지게 하며…'"

자세히 듣고보니 사회주의적 이상향과 같았다. 청 나라의 개혁가 캉유웨이(康有爲)의 '대동사상'도 쑨원(孫文)의 '천위위공․ 세계대동'도 이와 비슷하단다.

- 할아버지는 임시정부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당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60세 미만이었으므로 74세의 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됐습니다. 하지만 고령임에도 임시정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셨기에 주로 외교관을 하셨답니다. 임시정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지 않자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기도 했답니다."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1922년 7월 4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임시정부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상하이에서 김가진 선생의 장례행렬
 상하이에서 김가진 선생의 장례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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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가진,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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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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