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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인회.
  구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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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5일 오후 4시 4분]

LG 그룹 창업자인 연암 구인회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3월 1일을 전후해 YTN·<한국경제>·<문화일보>·<신동아>·<조선일보> 등은 그가 독립운동가 안희제에게 지금 돈 1억 원인 약 1만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한편, <한겨레>는 3월 13일자 기사 '5대 독립운동 기업이라는 LG, 정말 독립운동 지원했나?'(링크)에서 "사료가 명확하지 않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기사 제목에서 말한 '5대 독립운동 기업'은 LG를 포함해 창업자가 독립운동과 관련돼 있는 동화제약·유한양행·GS그룹·교보생명을 지칭한다.

구인회(1907~1969년)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1931년(24세)에 동생 구철회와 함께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상을 개업한 뒤 1947년(40세) 제조업체인 락희화학, 1959년(52세) 전자업체인 금성사, 1967년(60세) 한·미 합작 정유업체인 호남정유(GS 칼텍스), 1969년(62세) 반도체 기업인 금성전자를 세웠다.

안희제(1885~1943년)는 경남 진주와 붙어 있는 의령 출신으로 1909년(24세)에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뒤, 1914년(29세) 백산상회란 무역업체를 설립해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로 삼았으며, 1925년(40세)에는 중외일보사를 인수해 중앙일보사로 개칭했다.

1933년(48세)에는 만주에서 발해농장 및 발해학교를 설립했다. 그 뒤 대종교 핵심 간부를 겸직하면서 활동하다가 1942년(57세) 11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됐다. 9개월 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구인회가 안희제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일화의 근거는, 1979년에 방송작가 한운사(1923~2009년)가 집필하고 LG그룹 연암기념사업회가 펴낸 <연암 구인회>다. 이 책은 1984년 <총수의 결단>, 1993년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로 재출간됐고, 이를 기초로 2000년에 한국경영사학회에 의해 <연암 구인회, 상남 구자경 연구>가 발표됐다. 구자경은 구인회의 아들로서 현재 LG 명예회장이다. <연암 구인회, 상남 구자경 연구>는 일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1942년 5월 백산 안희제 선생이 찾아왔다. 그는 연암에게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기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의령 솔뫼골이 낳은 고명한 유림가의 안 교리 집안과 승산리 구 교리 집안은 교분이 있는 터라, 연암은 그 후 독립운동자금을 헌납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안희제가 구인회를 방문한 시점에 관해 LG그룹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1942년 5월이 아니라 7월 그믐"이라고 말했다. 위 책에 따르면, 두 가문 사이에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안희제가 경남 진주에 가서 구인회에게 1만 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 대해 위의 <한겨레>는 이렇게 보도했다.
 
"누구의 진술을 바탕으로, 어떤 기록을 근거로 구성된 것인지 사료는 명확하지 않다. 안희제 선생의 손자는 '구인회 회장이 안희제 선생에게 돈을 건넸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안희제 선생 관련 논문을 쓴 오미일 부산대 교수(한국 근현대사)도 '구 회장이 안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건넸다는 진술이나 자료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엘지 쪽은 "책이 오래 전에 쓰여, 어떤 근거로 이런 내용이 담겼는지 잘 알지 못한다"며 "다만, 두 분의 관계와 당시 상황에 대한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다"라고 말했다.

<한겨레>는 이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배경 중 하나로 구인회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제시했다. 1941년과 1942년, 그가 운영하던 회사가 수십 개의 기업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찬양 광고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또 구인회는 1944년, 태평양전쟁 기간의 물자통제를 담당하던 경남상공경제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친일 광고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주장을 하려면, 근거가 더욱 더 탄탄해야 한다. 원래부터 독립운동과 연관돼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한층 더 강력한 근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운사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LG그룹 관계자는 "구인회의 부친인 구재서가 1930년대에 백범 김구에게 운동자금 5천 원을 지원한 사실도 있기 때문에 창업주도 그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면, 아들 역시 독립운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봤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친일 광고 참여 등에도 불구하고, 구인회가 내심으론 독립운동을 응원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운사의 '자금 지원' 진술에 구체적 근거가 없기는 하지만, 이를 근거로 한운사의 진술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운사의 진술이 진짜가 아니라고 입증할 만한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운사의 진술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서, 다른 자료 등을 통해 구인회와 안희제의 자금 수수 가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로선 명확한 결론 내리지 못하지만... 몇 가지 '추론'

첫째로, 1942년 중반에 구인회와 안희제가 동일한 공간에 있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부터 안희제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안희제 동생인 안국제가 형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글이 있다.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白山公家狀及遺事略錄)>이란 글이다. '백산 안희제(白山公)의 생애(家狀) 그리고(及) 행적(遺事)을 간략히 정리한 글(略錄)'이란 의미다. 글 후반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임오년 4월 병 때문에 귀향하여 반년간 치료하니 거의 완쾌에 이르렀다(壬午四月, 因病歸鄕, 半載治療, 庶期完蘇)."

1942년이 임오년이었다. 이에 따르면, 오랫동안 만주에 체류했던 안희제가 이 해에 6개월간 요양차 고향을 머물렀다. 따라서 1942년 중반에 안희제와 구인회가 진주에서 만나는 것은 가능했다. 이 점은 자금 지원설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운사가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을 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자금 지원설의 신빙성을 많이 높여준다고 보기는 힘들다.

둘째로, 안희제가 금전 지원을 요청할 만한 사정이 있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점도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안희제는 1941년 10월 대종교에서 '천전(天殿, 단군전) 건축 준비위원회' 총무국장에 임명됐다.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에는 그것이 임오년 10월의 일이라고 언급됐지만, 실제로는 전년도인 신미년(1941년) 10월의 일로 보인다. '임오년 10월' 사건을 소개한 뒤 '임오년 4월' 사건을 설명하고 다시 '임오년 10월' 사건을 소개한 것을 보면, 앞의 '임오년 10월'은 '신미년 10월'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안희제가 천전 건축준비위원회 총무국장이 된 뒤 구인회를 찾아갔다면, 재정 지원을 청하러 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기회에 독립운동 자금도 함께 부탁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점은 안희제가 구인회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대종교와 임시정부는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그래서 일본 경찰도 대종교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감시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별도의 독립운동자금을 요청 받지 않고 대종교 건축자금을 부탁 받는 것만으로도, 구인회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자금을 요청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임오년 10월'이 오기가 아니라 정확한 기록이라면, 그래서 총무국장이 된 시점이 1942년 10월이라면, 안희제가 구인회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한 뒤 총무국장이 됐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안희제가 자금을 요청한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금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자금 수수가 제3자들한테 포착됐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 사정으로 돈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단체 활동을 위해 자금을 요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이 안희제를 주목하고 있었으므로 제3자 인지의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안희제가 구인회를 만났다고 하는 시점으로부터 약간 뒤인 1942년 11월에 안희제가 대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희제가 기업인으로부터 거금을 받아 대종교나 임시정부에 제공한 지 얼마 뒤 체포됐다면, 이 문제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어느 정도라도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수사 과정에서 함구했다 하더라도, 거액이 대종교나 임시정부에 흘러 들어갔다면 소문이 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 경찰 쪽에서도, 대종교나 임시정부 쪽에서도 1만 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향후 새로운 기록이 출현한다면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자금 지원설의 신빙성을 떨어트리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만주에 있던 안희제가 1942년 중반에 경상도에 있었다는 점과, 안희제가 대종교 건축 문제로 돈이 필요했다는 점은 그가 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반면, 안희제가 돈을 받아 대종교나 임시정부에 제공했다는 사실이 제3자들에게 포착되지 않았다는 점은 구인회의 독립운동 지원설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1942년 당시 안희제가 자금 지원을 요청할 만한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구인회가 자금을 제공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사실확인 작업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선에서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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